[길을 묻고 답하다] 안중근 장군을 다시 생각 한다

일제는 1904년 한일의정서를 통해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간섭의 발판을 만들고 강압적 수단을 동원하여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이른바 보호정치에 들어갔다. 1907년에는 헤이그밀사 사건을 꼬투리 삼아 정미 7조약을 강요하여 입법, 사법, 행정 전반에 걸친 통치권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에서는 국권회복을 위한 활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안중근 의사는 연해주로 망명, 의장 겸 특파독립대장의 자격으로 100여명의 의병들을 이끌고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으나 일본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 후 1909년 대한제국 침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권총으로 사살한다. 안중근 장군을 이전까지는 ‘의사’라고 표현을 했는데 ‘장군’이란 표현이 적합하다.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재판을 받을 때도 “나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니 나를 군인으로 대우하고 군사재판을 열어달라”라고 했으니, 이토 히로부미의 사살이 개인의 테러가 아닌 조직적인 군사작전이었음을 역설한 것이다.
일본은 우리나라가 공식적이고 조직적으로 저항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안중근 장군의 주장을 묵살하였다. 안중근 장군의 의거는 보통사람의 의기로는 할 수 없는 일인데 홀홀단신 감행할 수 있었던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그 답은 장군의 국가관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다음은 장군의 휘호이다.

國家安危 勞心焦思(국가안위 노심초사)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 태운다

見利思義 見危授命(견리사의 견위수명)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爲國獻身 軍人本分(위국헌신 군인본분)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

恥惡衣惡食者 不足與議(치악의악식자 부족여의)
궂은 옷, 밥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더불어 의논할 수 없다


안중근 장군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국가관이 무엇인가를 몸소 실천한 표상이다. 만약, 나라야 어떻게 되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면 우리 민족에게 ‘하얼빈 의거’라는 민족의 의기를 드날린 업적은 없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의 안위를 위한 작은 삶을 살지 않고 조국의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몸 바친 안중근 장군의 뜨거운 애국심은 지금도 우리 가슴속에 살아서 전해지고 있다.

구용회 건양사이버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