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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고 답하다] 애국
  • 푸른신문
  • 등록 2020-04-0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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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근대화가 되기 이전 남자들이 여자를 아녀자라 하여 학업이나, 과거시험 응시 등 많은 것을 통제해 왔고 여성을 사랑하지만 사랑한다는 표현에 대해서는 많이 인색했었다. 지금은 사법고시 합격자 10명중 6명이 여성일 정도로 여성들의 권위 신장이 많이 됐지만, 근대화 이전에는 유교사상에 근거하여 오랜 시간동안 그런 분위기가 내려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사랑을 위해서는 그토록 인색했던 우리나라 남자들도 그 대상이 국가나 민족이 되었을 때는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 줄 알았다. 을사보호조약으로 하루아침에 나라를 잃었을 때, 전국 각지에서 수백 명의 의협 남아들이 통분을 이기지 못해 목숨을 끊은 것이나,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였다.또한 당시 권력이 막강했던 이토오 히로부미와 매국노 이완용과 송병준의 면전에서 월남 이상재 선생은 “대감들은 도쿄로 이사를 가라”고 했다. 느닷없는 월남의 말에 이완용과 송병준이 “영감 그게 무슨 말이요”라고 묻자 “당신들은 나라 망치는데 천재가 아니요. 당신들이 도쿄로 가면 일본도 망할 것이니까 하는 소리요”라고 기개 있게 말했다고 한다.국가를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린 대표적인 사례는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가 하얼빈에서 당시 일본 제국의 추밀원 의장이었던 이토오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처단한 일일 것이다. 당시 이토오는 러시아의 대장대신 코코프체프와 회담하는 날이었는데 이토오가 지나는 철로의 각 역은 삼엄한 경계에 휩싸였고 하얼빈의 경호는 더욱 삼엄했다. 이날의 환영행사는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장관이어서, 수천의 러시아군대와 의장대, 외국사절단 및 일본인들의 도열과 장중한 군악과 경축화포 소리는 천지를 흔들었다. 드디어 1909년 10월 26일 9시 10분, 이토오가 탄 러시아 철도국의 특별열차가 플랫폼에 미끄러져 들어와 멈추었다. 이토오와 그의 일행이 차에서 내려 의장대를 사열하고 각국 외교관과 의례적인 악수를 나누고 러시아 장교단 앞으로 발을 옮기려 할 때 장교단 뒤에서 불이 번쩍했다. 권총 3발이 이토오를 명중했고 그를 뒤따르던 몇몇 사람도 총에 맞아 쓰러졌다. 러시아 병정이 권총을 쏜 주인공을 붙잡으려고 해도 그는 도망치지 않고 “대한만세”를 세 차례나 외쳤는데 그가 바로 안중근 의사이다. 안중근은 현장에서 포박당해 그와 함께 거사를 도운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압송됐다.안중근 의사의 거사는 세계적인 사건이 되어 곳곳에 안의사의 장거를 기리는 글이 나왔다. 당황한 일제는 침략의 정당성을 안중근의 입에서 받아 내려고 이렇게 제의했다. “만약 재판할 때 단 한마디로 이토오를 살해한 것은 그의 정책을 오해했기 때문이라고만 말하면 무사히 석방시켜 주겠다”고 회유했으나 그때마다 안의사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자주성과 독립을 빼앗은 것은 이토오의 계략이므로 나는 한국의병(義兵) 참모중장(中將) 자격으로 특파되어 하얼빈에서 그를 죽인 것인데 지금 나를 포로로 취급하지 않고 일반 살인 피고인으로 심문하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안중근 의사는 사형선고를 받고 1910년 3월 26일 10시 15분, 그의 나이 31세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로 온 국민의 마음속에 애국사상이 깊이 자리 잡았다. 중국의 교과서에서도 그 쾌거를 칭찬했다.이처럼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 줄 아는 안중근 의사와 같은 분들이 계셨기에 현재의 독립된 우리나라가 있는 것이다.

구용회 건양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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