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태종 무열왕 때 화랑(花郞)이었던 관창은 15세 때 황산벌 전투에 참가하여 단신으로 적군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포로로 잡혔다. 백제의 장군이었던 계백이 어린 관창의 용맹에 탄복하여 죽이지 않고 신라군으로 되돌려 보냈다. 하지만 관창은 다시 적진으로 돌진하여 용감히 싸우다 다시 포로가 되었고 계백은 그의 목을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신라군에게 돌려보낸다. 신라군은 이런 관창의 죽음을 불사한 용기에 고무되어 모두 결사의 각오로 싸워 마침내 백제군을 대파하였다는 내용이다.
전신화상을 입고도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이지선 씨 이야기도 감동적이다. 그녀는 대학원 진학을 준비 중이던 2000년 여름,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음주운전자가 낸 6중 추돌 사고로 전신의 55%가 3℃ 화상을 입게 된다. 처음에는 좌절감으로 고통을 겪었지만 가족들의 헌신적인 사랑과 친구들의 한결같은 우정, 얼굴도 모르는 숱한 이웃들의 따뜻한 격려 덕분에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바닥을 훌훌 털고 일어났다. 모두가 끝이라고 말하던 순간에, 누구보다 환하고 빛나는 모습으로 이미 그녀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에는 신체 건강한 사람들도 힘들다는 42.195㎞의 뉴욕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게 된다. “전신 55%에 3℃ 화상, 온몸을 미라처럼 감은 붕대,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그 지점에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제 자신을 사랑한 자긍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지선 씨는 말한다.
1960년대 일본 야구 계를 뒤흔든 장훈 선수는 텃세가 드세기로 이름난 일본 프로야구 세계에서 떳떳하게 “나는 한국인이다”라고 외치며, 눈에 보이는 차별의 박해를 극복하고 최정상에 우뚝 선 의지의 인물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재일교포 집안에서 태어난 장훈은 미처 철도 들지 않은 네 살 때 오른쪽 손가락이 불에 타서 문드러지는 참혹한 화상을 입어 후천적인 왼손잡이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의지가 굳었던 그는 야구선수가 되겠다는 큰 뜻을 품고 중학교 때부터 연습으로 밤을 지새웠다. 야구 명문교인 나니와 상고 재학 중일 때도 잔인하리만큼 혹독한 훈련으로 사지가 멀쩡한 동료들보다 더 좋은 기량을 갖추게 된다. 빠른 발과 호쾌한 타격으로 프로야구에서도 당장 통할 수 있는 재목으로 널리 알려져 몇몇 이름 있는 구단이 입단을 권유해 왔다. 그는 비교적 약체 팀이긴 하지만 자신이 주전 선수로 활약할 수 있는 도에이 플라이어즈를 선택했다. 이때가 1959년이었다. 그리고 그해 신인왕에 선정되었고 이듬해에는 3할 대의 타율을 기록했으며, 1961년에는 대망의 수위타자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리고 구단이 페넌트레이스 첫 우승을 달성한 1962년에는 최우수 선수의 영예를 안았고 이어서 일본시리즈까지 우승하여 우승기를 치켜들고 고국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후 장훈 선수는 요미우리로 이적하여 왕정치 선수와 함께 2년 연속 팀을 페넌트레이스 우승의 위업을 달성하고 3,085 안타라는 전설적인 기록을 남긴다. 이런 장훈 선수에게 구단주와 일본 야구팬들은 계속 일본인으로 귀화(歸化)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장 선수는 이를 거부했다. 어느 날 타석에 들어선 그에게 관중석에서 “장선수 돌아가라”라고 외치자 다른 관중들이 “조센징 빠가야로”라고 합창한다. 그는 도저히 플레이를 할 수가 없어서 잠시 타석에서 자리를 이탈하였다가 다시 타석에 들어선 다음 관중들을 한번 흘끗 보고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와다시와 강고꾸 데스네”, 즉 “그래 나 한국인이다.” 그리고 그는 장외 홈런을 터뜨린다.
이와 같이 장훈 선수는 우리나라가 못살고 어려울 때 일본으로 귀화 할 것을 강요했지만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끝까지 굴복하지 않으면서 당당히 일본야구의 전설이 되었던 것이다.
구용회 건양사이버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