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길을 묻고 답하다] 조선왕조 500년의 버팀목
  • 푸른신문
  • 등록 2020-10-22 15:46:48
기사수정

자기관리를 위해서 금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이를 이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옛말에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써야 한다’, ‘황금보기를 돌 같이 하라’ 등 여러 가지 돈에 관련한 교훈적인 말들이 있지만 현대사회를 살아가며 여러 가지 형태로 금전적 유혹을 받게 된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금전의 유혹을 슬기롭게 극복한 사례를 알아봄으로써 교훈을 삼고자 한다.

영조 때 호조의 서리를 하던 김수팽(金守彭)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동생 역시 선혜청의 서리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동생집에 들러 보니 마당에 옷감을 염색하는 염료 항아리가 있었다.
“이 염료를 어디에 쓰려고 그러는가?”
“제 아내가 염색을 해서 궁한 살림에 조금 보태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가 다같이 국록을 먹고 있어 굶지는 않을 형편인데 집에서 이런 영업까지 하면 저 가난한 백성들은 무엇을 먹고 살란 말인가? 관리된 자가 백성의 생업까지 빼앗는대서야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
동생은 곧 항아리를 엎어 염료를 쏟아 버렸다.
이 일화는 ‘지봉유설(芝峯類說)’을 본 이수광의 ‘조선의 방외지사 (方外志士)’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성종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양관(梁灌, 1437∼1507)이라는 사람이 장흥부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때, 암행어사가 불시에 들이닥쳐 그 행장을 수색했다. 벼슬을 하는 동안 치부를 하지 않았는가 싶어서 였다.
그러나 행장 속에는 ‘소학(小學)’,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시집과 금(琴), 적(笛) 뿐이었다. 어사는 그 사실을 적어 임금께 아뢰었다.
성종은 양관을 당장 의주목사로 승진을 시켰다. 뿐만 아니라 화공을 시켜 어사가 양관의 행장을 뒤지던 그 장면을 그리게 하였다. 이후 벼슬아치들이 임지로 떠나기에 앞서 문안을 드릴 때, 그 그림을 가리키며 관직을 마치고 돌아올 때의 행색을 본받으라는 훈계를 했다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양관의 행장도(行裝圖)’라는 그림이다.

인용한 이야기들이 좀 장황하였지만 우리 조상들의 기상이 대개 이러하였다.
청백리로 역사에 기록된 사람만도 3백 명이 넘는다. 이런 꿋꿋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 험난한 역사 가운데서도 조선왕조가 500년이 넘도록 버텨 온 것은 아닐까.

구 용 회 건양대학교 교수

0
푸른방송_사이드배너
영남연합포커스_사이드배너
구병원
W병원
인기글더보기
최신글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
-
하루 동안 이 창을 다시 열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