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81. 서낭당과 마을동제 (1)

1) 프롤로그


문화유적탐방을 하다보면 종종 예상치 못한 반가운(?) 유적을 만날 때가 있다. 물론 반가움의 기준은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다. 필자는 민간신앙 관련한 유적을 만났을 때 큰 행복감을 느낀다. 사실 필자는 민간신앙과는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는 유교문화전문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사 중에 민간신앙 유적을 만나면 절대로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특히 ‘서낭당’이라 불리는 곳을 만나면 무조건 쳐들어가야 직성이 풀린다. 도대체 서낭당이 뭐길래? 

2) 서낭당의 유래

민간신앙 유적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을 하나 꼽으라면 서낭당을 꼽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서낭당은 마을입구, 길가, 고개마루 등에 있는 돌무더기·신목(神木)·당집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서낭당은 지역에 따라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성황당·선왕당·천왕당·당산·당집·당목·할매당·할배당·조산(무더기)·돌탑·천왕매기·골매기·수구막이·국수당·국시당·국사당·진또배기·돌무덤·말무덤 등등…’ 이중 서낭당은 강원도·경상도·충청도 등지에서 대체로 통용이 되는 반면, 전라남도와 제주도에서는 서낭당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민속학에서는 서낭당의 원형을 ‘돌무더기’로 본다. 돌무더기 서낭당 유래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강태공과 마씨부인 유래설’이다.

강태공은 오랜 세월 집안일은 생각지 않고 오직 공부만 하면서 세상에 나아갈 때를 기다렸다. 결국 가난에 지친 마씨 부인은 강태공을 떠났다. 후에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에 의해 등용이 되고, 무왕을 도와 주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제나라의 제후가 되었다. 제후가 되어 금의환향을 한 강태공은 귀향길에서 길을 닦고 있는 마씨 부인을 발견했다. 마씨 부인은 제후가 되어 돌아온 남편을 보고는 다시 부부가 되길 원했다. 이에 강태공은 한사발의 물을 구해 땅에 부은 후, 마씨 부인에게 말하기를 ‘그 물을 다시 사발에 채우면 그리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엎질러진 물을 다시 그릇에 주어 담을 수는 없는 법. 마씨 부인은 물이 아닌 사람들의 침을 구하러 다니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 이를 가엷게 여긴 사람들이 돌을 쌓아 마씨 부인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그 돌무덤을 지날 때마다 침을 세 번씩 뱉어 마씨 부인을 위로했다. 

이 외에도 돌싸움 전설·소진량 전설·소금장수 전설 등의 유래설도 있다. 또한 서낭당이 우리 고유의 서낭신앙에서 유래되었다는 자생설과 중국의 성황당(城隍堂)이나 몽골의 ‘오보’에서 유래되었다는 북방유래설도 있다. 어쨌든 우리 민속학에서는 선사시대 때 경계를 목적으로 쌓은 돌무더기가 나중에 신의 거처와 제단이 되었다가 종국에는 마을의 수호신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3) 서낭당의 유형

서낭당은 크게 4가지 유형이 있다. ‘돌무더기형’·‘신목형’·‘신목+돌무더기형’·‘신목+당집형’이 그것이다. ‘돌무더기형’은 말 그대로 돌을 쌓아놓은 돌무더기를 말하고, ‘신목형’은 신령이 깃든 나무를 말한다. ‘신목+돌무더기형’은 신목과 돌무더기가 합쳐진 형태요, ‘신목+당집형’은 신목과 당집이 합쳐진 형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돌무더기는 돌탑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서낭당의 원형으로 보는 돌무더기는 작은 크기의 돌들을 무작위로 쌓은 것이다. 이에 비해 돌탑은 상대적으로 큰 돌들을 사용해 아래에서부터 정성껏 쌓아 올린 것으로, 돌탑 아래 땅 속에다 오곡을 담은 솥 등의 기물을 묻기도 하고, 돌탑 상부에 거북돌이나 선돌을 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돌무더기와 돌탑이 안과 밖을 경계 짓고, 액을 막고 복을 기원하는 공간이라는 점은 서로 같다. 신목은 돌무더기와 함께 서낭당의 가장 일반적인 유형 중 하나다. 신목은 나무줄기나 가지에 금줄이 둘러쳐져 있거나 한지나 오색 비단천이 걸려 있는 예가 많다. 건물형식을 빌린 당집은 돌무더기나 신목 보다는 나중에 등장한 유형이다. 아마도 유교의 영향을 받아 인격화된 서낭신의 거처 및 제사공간으로써 당집이 등장한 듯하다. 종종 돌무더기나 신목 없이 당집만 남아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세월에 따른 신목의 고사나 돌무더기의 훼손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4) 서낭당 제의의 특징

서낭당에서 행해지는 제의는 목적과 형식에 있어 다양한 특징을 보인다. 먼저 제의의 목적을 보면 개인적 목적의 제의와 공동체적 목적의 제의의 특징을 모두 지니고 있다. 마을입구·길가·고개마루 등과 같이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곳의 서낭당은 대체로 돌무더기형·신목형·돌무더기+신목형이 많다. 이곳에서는 주로 길손들이 안전을 기원하거나, 주민들이 개인적인 소원을 기원한다. 제의행위로는 비손[두 손을 비비면서 신에게 소원을 기원하는 행위]을 하거나, 돌을 세 번 던지거나 침을 세 번 뱉기도 하고, 한지나 오색천을 나뭇가지에 걸기도 하고, 간단한 음식과 술을 바치기도 한다. 이는 서낭신에게 일종의 공양물을 바치는 행위다. 반면 마을 깊숙한 곳이나 산중에는 당집형 서낭당이 많다. 여기에서는 마을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동제가 주로 행해진다. 동제는 형식과 절차적인 측면에서 보면 ‘유교식’·‘무속식’·‘유교+무속식’이 주를 이룬다.

5) 에필로그

세상 어디를 가도 그 나라, 그 민족 고유의 민간신앙이 있기 마련이다. 반 만 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민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 고유의 민간신앙은 미신이라는 굴레가 덧 씌워진 채 타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제 막 50대에 들어선 필자만 해도 초등학생 시절, 미개한 우리 민간신앙은 버리고 대신 우수한 서양문화를 받아들어야 잘 살 수 있다고 배웠으니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21세기 최첨단 정보통신사회가 된 지금도 우리나라 시골 곳곳에는 많은 수의 서낭당이 남아 있지 않은가. 이는 우리들의 뼛속 깊이에 유교와 민간신앙이라는 인이 박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