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80. 운흥사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이 있다? 없다?

1) 프롤로그


최정산 북편과 가창댐 상류가 맞닿는 곳, 달성군 가창면 오리(梧里)다. 오리라는 지명은 오동나무가 많아서 붙은 이름이다. 가창댐 입구교차로에서 헐티로를 차로 10분쯤 달리면 신오교가 나온다. 여기서 좌회전해 운흥사 이정표를 따라 다시 5분 정도 더 가면 천년고찰 최정산 운흥사를 만날 수 있다.
 
2) 동림사→수암사→운흥사

운흥사(雲興寺)는 지금으로부터 약 1,200년 전인 신라 흥덕왕 때 운수 스님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운흥사 창건설화에 의하면 창건 당시 사찰의 이름은 동림사요, 처음의 위치는 지금과는 달리 최정산 정상부였다고 한다. 최정산은 예로부터 대구·현풍·청도 세 지역의 경계로, 왕래하는 사람들로 인해 절 주변이 늘 소란스러웠다. 그래서 주지는 조용한 곳으로 절을 옮기려 했다. 그때 한 노인이 나타나 주지에게 말하기를 절 앞의 연못을 메우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이라고 했다. 주지는 노인의 말대로 연못을 메워버렸다. 그런데 연못을 메우고 나니 절이 조용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신도들의 발길이 끊어져버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주지는 어쩔 수 없이 절을 곡산으로 옮기고 절의 이름을 수암사로 바꿨다. 그래도 신도가 없자 주지는 지금의 자리로 다시 절을 옮기고 절 이름을 운흥사로 바꿨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날 이후부터 마치 구름이 일어나듯 신도가 몰려들어 절이 번창 했다고 한다. 한편 운흥사는 최정산 남쪽에 있는 남지장사와 더불어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 300여 명을 지휘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18세기 중엽에 간행된 『여지도서』의 대구부 불우조에 최정산 운흥사가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운흥사의 위상을 가늠해볼 수 있다. 운흥사의 내력을 요약해보면 1620년(광해군 12)에 무념대사가 중창, 1757년(영조 33)에 치화대사가 중건했으며, 근대에 와서는 1954년 후불탱화 봉안, 1966년 대웅전 보수 및 요사채 건립, 1972년 대웅전 삼존불상 개금, 1976년 선불장과 선방 신축, 1979년 마당 확장 및 축대 조성, 1984년 석등 2기 건립, 1992년 단청 작업, 1998년 종각 건립에 이어 2019년 현재 새 법당인 천불전의 준공을 앞두고 있다.

3) 대웅전에 모셔진 아미타삼존불

우리나라 사찰의 주법당에는 대부분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삼존불은 글자 그대로 세 분의 존귀한 불보살인데, 가운데 주불을 두고 그 좌우에서 불보살이 보좌하는 형식이다. 예전에 이미 살펴본 것처럼 사찰 법당의 이름은 봉안된 주불에 따라 달라진다.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신 법당의 이름은 대웅전·대웅보전이다. 이곳에는 일반적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약사여래나 아미타불, 연등불이나 미륵불 등을 좌우에 모신다.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신 법당은 비로전·화엄전·대적광전·대광명전이다. 여기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에 두고 좌우에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을 봉안한다.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 법당은 미타전·무량수전·극락전인데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모셔진다. 약사여래불을 주불로 모신 법당은 약사전·유리보전이고, 이곳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보살로 모셔진다. 그런데 이러한 원칙에 입각해 운흥사 대웅전을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운흥사의 주법당은 분명 대웅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당에는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지 않다. 운흥사 대웅전에는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모셔진 아미타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조선 중기에 활동한 조각승 도우가 1653년(효종 4) 제작한 것으로 보물 제18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로 도우는 이 운흥사 아미타삼존불을 제작하고, 2년 뒤에는 용연사의 아미타삼존불을 제작하기도 했다.

4) 불상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구나

탑이나 불상은 시대에 따라 형식이나 형태가 다르게 나타난다. 그래서 탑이나 불상은 겉으로 드러나는 특징적인 겉모습만으로도 조성시기를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불상은 무엇을 가지고 조성시기를 추정할 수 있을까? 가장 손쉬운 방법은 허리의 각도를 보면 된다. 다시 말해 가부좌를 하고 있는 불상을 옆에서 보았을 때, 허리를 기준으로 하는 상체의 각도를 살피면 된다. 만약 허리가 활모양으로 뒤쪽으로 젖혀져 있으면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이요, 거의 90도 각도로 둔탁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으면 고려시대의 불상이요, 허리와 상체가 앞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면 조선시대의 불상이다. 여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사찰 법당은 오직 부처님을 위한 공간일 뿐, 신도들이 예배를 위해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법당 안에는 오직 불상만이 정중앙에 모셔졌다. 따라서 신도들은 법당 밖에서 멀리 법당 안에 모셔진 불상을 바라보며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숭유억불정책으로 사찰의 규모도 축소되고 신도수도 줄어들었던 조선시대는 달랐다. 법당 정중앙에 있던 불상이 법당 뒷벽 쪽으로 물러나고, 그 빈 공간만큼을 신도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처럼 신도와 불상 간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자연스럽게 불상의 허리각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거리가 먼 때는 불상의 허리가 곧추세워지거나 아니면 뒤로 젖혀졌지만, 거리가 가까워지자 반대로 허리가 앞으로 굽기 시작한 것이다. 자비의 부처님이 중생들과 눈을 맞추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상체를 앞으로 구부린 것이다.  
  
5) 에필로그

가창일대는 대구지역에서 물이 가장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대구의 명당수인 신천도 가창면 최정산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골짜기에서 샘솟은 물이 한데 모여 만들어낸 작품이다. 그래서일까. 운흥사 입구 주차장 한 편에 있는 샘물은 물맛 좋기로 소문이 나 있다. 이번 주말 운흥사로 갈 계획이라면 생수통도 잊지 말고 꼭 챙겨 가시길.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