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65. 하빈에서 질그릇을 굽다, 도곡재

1) 프롤로그

중국역사를 통틀어 가장 이상적인 시대는 ‘요순시대’라고 한다. 여기서 요순시대라 함은 고대 중국의 전설적인 임금인 요임금과 순임금이 다스리던 시대를 말한다. 그런데 요순시대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이 몇 가지 있다. 요임금이 세운 당나라와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의 건국연대가 거의 일치한다는 점과 순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하빈’이라는 곳에서 질그릇을 구웠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하빈’이라니. 우리고장 달성군에도 똑같은 지명인 하빈면이 있는데…. 이번에는 하빈면 묘골에 있는 도곡재에 대해 알아보자.  

2) 남에게 왕위를 넘기다, 선양

유교에서 성인으로 칭송받는 요임금과 순임금. 요임금은 순임금에게 왕위를 넘겼다. 그런데 요임금과 순임금의 관계가 좀 이상하다. 혈연관계가 아닌 남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둘 간의 왕위계승 방법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왕위계승 방법과는 좀 다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방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요순시대만 해도 왕위계승방법은 좀 달랐다. 혈육에게 왕위를 넘긴 것이 아니라 성인의 덕을 갖춘 인재를 찾아내어 그에게 왕위를 넘겼던 것이다. 요임금이 남남인 순임금에게 왕위를 넘겨준 것처럼 순임금 역시 남남인 우임금에게 왕위를 넘겼다. 하지만 ‘선양’이라 칭하는 이런 식의 왕위계승은 우임금에서 끝이 난다. 우임금이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넘겼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세상의 왕들은 인재를 찾아 왕위를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3) 농사짓고 질그릇 굽고 물고기 잡고

『서경』·『맹자』·『사기』 등에 순임금 관련하여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유명한 텍스트가 하나 있다. 요임금에 의해 ‘픽업’되기 전, 순임금이 역산에서 농사를 짓고, 하빈에서 질그릇을 구웠으며, 뇌택에서 고기잡이를 했다는 텍스트이다. 이로부터 역산·하빈·뇌택이라는 지명은 순임금을 상징하는 지명이 되었다. 그런데 이 텍스트가 던지는 또 다른 메시지가 하나 있다. 바로 성인군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인물이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채 은거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혹시 아시는지? 우리고장에 하빈이 있으며, 그 옛날 이 하빈에 살면서 자신의 호를 질그릇 굽는 골짜기라는 뜻에서 도곡이라 칭한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4) 하빈에서 물고기 잡고, 도곡에 은거하다

조선시대 우리 대구를 대표하는 유학자를 칭송하는 표현으로 ‘달성십현’이라는 말이 있다. 그 중에 박종우[朴宗祐·1587-1654]라는 인물이 있다. 자는 군석, 호는 도곡인데 별칭으로 ‘하빈조수[하빈에서 물고기 잡는 노인]’라고 불렸던 인물이다. 그는 사육신 박팽년의 6세손으로 달성군 하빈면 묘골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생을 마친 인물이다. 그는 일찍부터 낙재 서사원과 한강 정구 양 문하에 나아가 수학했다. 그런 그를 일러 당시 사람들은 문장·절의·덕행을 모두 갖춘 천하에 둘도 없는 큰선비로 칭송했다.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남한산성에 고립되자, 신하된 도리로서 편히 지낼 수 없다며 거적가마니를 깔고 그 위에서 50여 일간 노숙을 했다. 하지만 삼전도 굴욕의 소식이 전해지자 거꾸로 된 세상에 글은 남겨 무엇하리오라며 북쪽을 향해 두 번 절을 한 후, 자신의 평생 저술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19년의 세월 동안 하빈 묘골에서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이러한 까닭에 그를 ‘숭정처사’라 칭하기도 한다.

5) 박종우를 기리는 재실, 도곡재

도곡재(陶谷齋)는 말이 재실이지 구조를 보면 일반 양반가의 주택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1778년(정조 2), 이 집이 처음 지어질 때만해도 이 집은 박팽년의 14세손으로 대사성을 지낸 박문현의 개인집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후 1800년대에 와서 그의 8대조가 되는 박종우의 재실로 용도가 변경되면서 ‘도곡재’라 불리게 된 것이다. 서향으로 문을 낸 높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작은 연못과 함께 동서로 길게 늘어선 사랑채와 중문채가 한 눈에 들어온다. 사랑채는 정면 5칸·측면 1.5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중문채는 정면 3칸·측면 1칸의 건물로 3칸 중 서쪽 한 칸이 중문이며 나머지 두 칸은 행랑채다. 중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ㄱ’자형 안채가 있고, 우측으로 초가지붕의 고방채가 있다. 안채는 모두 5칸인데 좌·우 맨 끝에 부섭지붕을 달아내어 협칸을 두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두 개의 협칸이 하나는 기와지붕이고 다른 하나는 초가지붕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현재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어 있다.

6) 에필로그

달성십현의 한 분이자, 대구지역 숭정처사의 한 분인 도곡 박종우. 그는 인생 말년을 자신의 호처럼 이곳 하빈에서 질그릇을 굽고, 물고기를 잡으며 은거를 했다. 마치 4,300년 전 중국의 순임금처럼 말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두 인물의 삶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순임금은 요임금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박종우는 하빈 땅에서 처사로서 일생을 마쳤다는 점이다. 하지만 두 인물에 공통점도 있었으니 도가 통할 때는 세상에 나아가 천하를 다스리고, 도가 통하지 않을 때는 물러나 은거하라는 성인의 말씀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이제 곧 봄여행주간이다. 묘골 육신사 여행계획이 있는가. 그렇다면 육신사 아래 도곡재도 꼭 한 번 들려보기를 권한다. 봄·여름·가을, 철따라 변하는 도곡재 뜰의 꽃밭을 감상하는 재미가 유별나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