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54. 본말리 달창지와 고령김씨 효행비

1) 프롤로그
대구광역시에서 농업용저수지로 규모가 가장 큰 것은 무엇일까? 우리 고장 유가읍에 있는 달창지다. 달창지는 규모가 큰 탓에 저수지 가운데로 달성군과 창녕군 경계가 나있다. 달창지라는 이름도 ‘달’성군과 ‘창’녕군에서 한 글자씩 가져온 것이다. 달창지 북동쪽 절반을 품은 곳에 유가읍 본말리가 있다. 달성군 내에서도 오지로 알려진 본말리. 이번에는 본말리 달창지와 고령김씨 효행비에 대한 이야기다.

2) 북동으로 비둘산, 남서로 달창지
비슬산 한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내리다 가태리와 본말리 못 미쳐 멈춰선 산이 있다. 산모양이 비둘기를 닮아 비둘산[647m]이라 불리는 산이다. 본말리 인근 한정리, 가태리에서 바라보이는 비둘산은 산 정상부가 뾰족한 삼각형 모양이다. 풍수에서는 이런 산을 ‘목(木)형’이라 하는데 주로 학자형 인물이 많이 난다고 본다. 그래서일까. 한정·가태·본말은 인물이 많이 났다.
본말리는 비둘산을 중심으로 남서쪽 본말1리와 남동쪽 본말2리로 나눠진다. 본말1리는 비둘산과 달창지 사이에 끼어 있는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태봉·신기·개백·원본말·금호 등이 있다. 태봉은 한정리에서 달창지를 끼고 본말리로 들어가는 길목 우측에 있었으나 수몰되어 사라졌다. 태봉이라는 이름은 신라시대 어느 임금 태를 묻은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어 만나는 마을은 달창지 연안마을인 신기와 비둘산 쪽 개백이다. 신기(新基)는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이고, 개백[蓋百·개배기]은 마을에 과거시험 합격증명서인 백패·홍패가 걸린[掛·걸 괘] 집이 많다[百]는 데서 유래된 마을 이름이란다. 처음에는 ‘괘백’으로 불리다가 나중에 개백이 되었다고 한다. 본말2리 쪽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근본이 되는 마을 ‘원본말’이 있고, 마을 앞에 금빛처럼 빛나는 작은 연못이 있어 ‘금호동’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다.
본말2리는 개곡(蓋谷)·개실·가곡(可谷) 등으로 불린다. 마을 형국이 마치 그릇뚜껑을 닮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비둘산 남동쪽 산기슭에 자리한 개곡은 마을 앞으로 흐르는 곽천(藿川)[또는 후천(後川)]을 경계로 창녕군 성산면과 접해있다. 능성구씨 집성촌이기도 한 개곡은 달창지 연안에 접한 본말1리와는 달리 비둘산 기슭에 자리한 산촌 오지마을이다.
본말2리 개곡마을 앞을 지나 달창지로 흘러들어가는 작천 하류에 이 일대에서 가장 큰 마을이 있다. 달성군 유가읍 원본말과 창녕군 성산면 곽천마을이다. 이 두 마을은 작천이라는 작은 하천을 경계로 나눠진다. 그런데 성산면 쪽 곽천마을 지명유래가 흥미롭다. 곽은 콩잎을 뜻하기도 하지만 ‘미역’을 뜻하기도 한다.

옛날 곽천마을 부용정 인근에 깊은 소와 바위가 있었다. 하루는 이 마을에 사는 한 효자의 부모가 미역국과 조기를 먹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효자는 바닷가도 아닌 산골마을에서 미역과 조기를 구할 수 없었다. 효자는 소 옆 바위에서 신령께 기도를 했다. 그런데 며칠 후 신기하게도 효자는 소에서 미역을 얻고 조기를 잡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이 바위를 미역바우[작암]라 불렀다. 지금 작암은 달창지 건설로 물에 잠겨 찾아 볼 수 없다. 
달창지 너머로 가운데 봉긋하게 솟아 오른 산이 태봉이다.
고령김씨 효행비, 뒤편에 청도김씨 정려각이 보인다.

3) 쌍뱀 전설이 깃든 달창지
9년 여 공사 끝에 1972년 준공된 달창지는 경남 창녕군 성산면 운봉천과 본말리 작천 물이 모여 드는 곳이다. 둑 길이 512m, 둑 높이 20m에 이르는 대형 저수지로 담수과정에서 3개 마을이 수몰됐다. 본래 이 지역에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저수지 건설 계획이 있었으나 규모가 너무 커 공사 시작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달창지 인근마을에는 달창지 건설 관련해 전설 하나가 전한다. ‘달창지 쌍뱀 전설’이다.

일제 강점기 때였다. 좋은 날을 받아 저수지 공사를 시작하려 했다. 그런데 저수지 터에 있는 당산나무가 문제였다. 마을 수호신이 깃든 당산나무는 높이 20m, 아래둥치 지름 2.5m에 이르는 수령 500년 느티나무였다. 마을주민들은 이 나무에 당산나무 수호신인 쌍뱀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저수지 공사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불도저를 동원해 나무를 밀어내기로 했다. 그런데 불도저가 나무에 닿자마자 아무런 이유 없이 불도저가 멈췄고, 기사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다른 기사가 다시 도전을 했지만 그 역시 죽었다. 마을주민들은 당산나무 ‘지킴’ 쌍뱀이 독을 품어 그렇게 된 것이라 믿었다. 지킴은 예로부터 집이나 나무 등에 살면서 일정지역을 지키는 ‘(집)뱀’ 또는 ‘(집)구렁이’를 일컫는다.    

4) 시어머니 눈을 뜨게 한 효부 고령김씨
본말1리 마을회관 인근 도로변에 정려각 1채와 비각 1채가 서로 인접해 있다. 정려각은 효자 김처정과 김여택의 처 열부 재령이씨를 기리는 ‘청도김씨정려각’으로 본 지면에서 이미 다룬 적이 있다.[2019.11.18] 이 정려각에서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고령김씨 효행비각이 있다. 김련묵의 부인 고령김씨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마을주민들이 세운 효행비(각)다.

부인은 좌윤을 지낸 김상휘의 8세손 김진홍의 딸로 어려서부터 효행이 있었다. 18세 때 안동김씨 김련묵에게 시집을 갔다. 가난한 살림에도 부인은 지극정성으로 홀로 된 시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느 해 시어머니는 눈병을 앓다가 결국 눈이 멀고 말았다. 이때부터 부인은 외출을 할 때 시어머니를 업고 다녔으며, 식사를 할 때는 시어머니에게 무슨 음식인지 일일이 알려주며 직접 음식을 떠먹였다. 그로부터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번에는 부인이 병을 얻어 시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뜨게 됐다. 부인은 “죽어서라도 신령님께 기도해 불쌍한 시어머니의 눈을 꼭 뜨게 하리라” 다짐했다. 부인의 소원이 통했던 것일까! 부인의 소상[첫 제사] 날 저녁, 시어머니가 홀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내 눈이 밝아졌다”고 말했다. 기적이었다. 시어머니의 눈이 떠졌던 것이다. 이를 지켜 본 고을 사람들은 효부 고령김씨의 효성에 하늘이 감동했다며 마을에 효행비를 세웠다. 

고령김씨 효부비각 기문은 유가읍 음리 이애정 주인 계암 성기덕 선생이 지었고, 비문은 파리장서 초안[회당본] 저자 회당 장석영 선생이 지었다. 참고로 두 선생은 구한말 영남을 대표하는 큰 선비다.

5) 에필로그
유가읍 남쪽 끝자락에 자리한 본말리에는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문화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엄익하를 기리는 영월엄씨 재실 경모재, 김경필을 기리는 김해김씨 재실 경모재, 구한만을 기리는 능성구씨 재실 만송재, 창녕성씨 석정종중 정자인 죽포정, 서흥김씨 재실 낙산재·이동재, 곽암재 등. 또 달창지 상류 운봉천 변, 달성군과 창녕군 경계지점에 정말 멋진 유적이 있다. 한강 정구 선생과 그의 제자인 임란의병장 부용당 성안의 선생 유적인 부용정과 경현사다. 참고로 성안의 선생은 춘향전에 등장하는 이몽룡의 실제 인물로 알려진 성이성의 아버지다. 선생이 1607년 남원군수로 부임할 당시 13세였던 성이성도 함께 따라갔으며, 이후 문과급제한 성이성은 호남 암행어사로 활동할 때 남원을 들렀다는 기록이 전한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