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화려하고 멋스러운 효자비각, 논공 하리 백원각

1) 프롤로그
오랜만에 효자비(각) 이야기를 해보자. 조금 다른 내용이지만 우리 고장에는 현재 15개 내외의 정려각이 있다. 대구 전체 정려각 수가 35개 정도가 되니 대구 정려각 절반이 우리 고장에 있는 셈이다. 앞서 본 지면을 통해 몇 개의 정려각과 비각을 소개한 바가 있다. 국내 최대 규모의 다칸형 정려각 ‘현풍곽씨12정려각’, 박팽년·박순·박일산 3부자의 충절을 기린 정려각 ‘삼충각’, 그리고 돌로 만든 석조 비각 ‘송병규 효자비각’·‘충주석씨 절부비각’ 등. 이번에는 우리 고장에 있는 효자비각 중 가장 화려하고 멋스러운 백원각(百源閣)에 대해 알아보자.

2) 정려각과 비각
많은 이들이 정려(각)과 비각을 혼동한다. 정려(각)은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충신·효자·열녀에 대해 조정에서 내린 표창이다. 정려는 본래 정표자의 집 대문 앞, 혹은 마을 앞에 세운 허문(虛門)이다. 허문은 말 그대로 문틀만 있고, 가운데 문짝과 문 좌우로 이어진 벽체가 없다. 흔히 알고 있는 홍살문을 생각하면 된다. 다만 정려가 홍살문과 다른 점은 문 상부에 정려 내용을 새긴 정려편액이 걸려 있다는 점이다.
노상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 정려는 나무로 만든 탓에 수명이 짧다. 그래서 정려가 노후 되면 정려 상부에 게시된 정려편액만 떼서 별도 건물에 보관했는데, 이 건물을 정려각이라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정려각의 기능도 변했다. 정려각 내부에 봉안한 기물이 정려편액 외에 정려(각)의 내력을 새긴 정려비·정려기문 등으로 늘어났다.
정려를 봉안한 건물을 정려각이라 하는 것처럼 비를 보호하고 보존하기 위한 건물을 비각이라 한다. 이처럼 정려각과 비각은 그 내부에 어떤 물건을 봉안하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근원적 차이가 있다. 바로 ‘국가공인’인가 아니면 ‘관인’인가의 차이다.
우리나라는 일제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1910년 이전에는 조정에서 내려주는 정려가 있었다. 하지만 조정이 사라진 1910년 이후에는 정려라는 게 있을 수 없었다. ‘충신·효자·열녀’를 장려하기 위한 목적의 정려제도를 일제가 인정할 리 없었던 것.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나온 것이 ‘유림향약본소’와 ‘오륜행실중간소’ 같은 조직이었다. 비록 정려를 내려 줄 조정은 없어졌지만 우리의 미풍양속을 지키고 장려하는 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유림향약본소와 오륜행실중간소는 추천과 심사를 통해 대상자를 선정, 정려 대신 ‘포창완의문’·‘포장’ 등을 발급했다. 비유하자면 정려는 ‘대통령 표창’ 혹은 ‘국가공인자격증’이라 할 수 있고, ‘포창완의문’·‘포장’ 등은 신뢰할만한 관계기관에서 발급한 ‘관인자격증’ 정도로 볼 수 있다.
이를 효자정려·효자비에 비교해 설명해보면 이렇다. 1910년 이전 조선이나 대한제국 조정에서 인정한 것은 ‘효자정려’요, 1910년 이후 유림향약본소·오륜행실중간소에서 인정한 것은 그냥 ‘효자비’가 되는 것이다. 참고로 광복 이후 유림향약본소·오륜행실중간소 등이 사라지고 난 뒤에는 성균관과 향교가 이들의 역할을 대신했다.

3) 사성당 윤재훈
윤재훈(尹載勳·1857~1918)의 자는 문로(文老), 호는 사성당(四省堂)이다. ‘사성당’이라는 호만 봐도 그가 어떤 삶을 추구한 인물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공자의 제자 중 효에 가장 밝았다는 증자의 ‘일일삼성’[一日三省·하루에 세 번 자신을 돌아본다] 고사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하늘이 내린 효자로 알려진 윤재훈의 효행은 대략 이러하다.

윤재훈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후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우애가 깊었다. 5-6세 어린나이에도 집 밖에서 홍시나 밤을 구하면 반드시 가슴에 품고 집으로 돌아와 부모님께 드렸고, 부모님께서 그것을 다 드시고 난 후에라야 비로소 자리에서 물러났다. 1886년(고종 23)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슬픔으로 몸과 마음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이때 상례로 인해 건강을 잃는 것은 효자의 도가 아니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힘입어 슬픔을 이겨냈다. 아버지의 가슴에 종기가 생기자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 치료했고, 병이 있을 때마다 지극정성으로 병구완을 해 아버지를 완쾌시켰다. 한번은 오랜 병중에 있는 아버지를 낫게 해달라고 천지신명께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했다. 그러자 어느 날 꿈에 신선이 나타나 아버지의 병은 산삼과 미꾸라지를 달여 먹으면 낫는다고 했다. 하지만 엄동설한에 산삼과 미꾸라지를 구하지 못하자 다시 하늘에 기도를 했다. 그의 기도에 하늘이 감응한 것인지 그는 눈 덮인 산속에서 산삼을 얻었고, 얼음판에서 미꾸라지를 얻었다. 이를 정성껏 다려 아버지께 드리자 아버지의 병이 완쾌됐다.

이러한 사실이 고을을 넘어 조정에까지 알려지자 1898년(고종 35), 조정으로부터 소릉참봉의 벼슬이 내려졌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후인 1922년, 오륜행실중간소로부터 효행으로 포장을 받았고, 1936년 지방 유림의 공의로 마을 입구에 효자비각을 세우고 백원각이라 이름 했다. 문집으로는 『사성당 효행 시문집』이 전한다.

백원각을 둘러싼 흙돌담과 배롱나무
하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화려한 상부구조

4) 효는 백행의 근원, 백원각
옛 약산온천 입구 논공청소년야영장 서편 담장 바깥에 있는 백원각은 우리 고장에 있는 정려각·비각 중 가장 화려하고 멋스러운 비각 중 하나다. 백원각은 기와를 얹은 방형 흙돌담 안에 있는데 일반 비각에 비해 담장 안 공간이 꽤 넓은 편이다. 정면 1칸·측면 1칸 규모로 비각 상부 목재 부재에 화려한 금단청을 입히고, ‘다포식+익공식’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얹어 격을 한껏 높였다. 비각 내부에는 가운데 효자윤공재훈지비가 있고, 내부 벽에 백원각기·백원각상량문 등이 걸려있다. 지금의 비각은 2012년 새롭게 중수한 것이다.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던 옛 모습은 사라졌지만, 보수와 사후 관리가 잘 되고 있어 다행이다.

5) 에필로그
윤재훈 효행비각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 맨 마지막 구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2012년에 건물을 고치던 중 상량문과 은반지가 발견되었다’
전통건축물을 수리할 때 가끔씩 대들보 등에서 상량문을 포함한 각종 유물들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백원각에서는 중수 때 상량문과 함께 은반지가 나왔다. 그런데 상량문은 그렇다 치고 난데없이 은반지가 왜 나왔을까?
은반지는 예전에 여성들이 즐겨 꼈다. 특히 쌍가락지는 남편 혹은 사랑하는 이가 먼 길을 떠날 때 그 정표로서 각각 하나씩 나눠 가지곤 했다. 백원각 대들보에서 나온 은반지. 혹시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을 위해 부인이 넣어둔 것은 아닌지? 나중에라도 문중 관계자를 만나면 백원각 은반지의 연유에 대해 꼭 한번 여쭤봐야겠다. 독자들도 궁금하지 않은가?

[지난 2020년 10월 11일. 오랜만에 백원각에 들렀는데 흙돌담 밖으로 철제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고 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