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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15. 쌍계리 치마거랑 마을 유적(2)
  • 푸른신문
  • 등록 2020-05-0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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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치마거랑 랜드마크, 당산등

치마거랑 마을 유적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보자. 치마거랑 마을은 최첨단과학기술을 연구하는 대구경북과학기술원[디지스트]과 테크노폴리스 아파트 단지 사이에 끼어 있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매우 특별한 공간이다. 필자가 보기에 치마거랑 마을 대표 랜드마크는 마을 뒷동산인 당산등인 것 같다. 당산등(堂山嶝)은 마을 수호신격인 당산나무가 있는 고개언덕이다. 당산등은 비슬산 지맥이 마을 북쪽 장군만댕이를 지나 남쪽으로 마을 안 깊숙한 곳까지 내려와 끝은 맺은 작은 봉우리. 풍수에서 말하는 명당을 만들어내는 현무봉이다. 풍수에서는 먼 산으로부터 쉼 없이 달려온 용맥이 자신이 쉴만한 명당을 찾게 되면 그곳에다 용머리를 묻는다고 한다. 당산등이 바로 명당을 찾아 머리를 묻는 용머리요, 그 아래 치마거랑 마을이 명당인 것이다. 당산등은 현재 관리가 잘 되고 있다. 마을 체육시절이 있는 영귀정에서부터 계단을 오르면 수령 200-30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소나무 3~4그루가 있는데 이곳이 당산등이다. 제일 잘 생긴 당산 소나무 아래에 마을동제를 지내는 당산제단이 조성되어 있다. 당산등은 1990년대 초 위기가 한 번 있었다. 10여 그루 당산등 소나무 중 다섯 그루가 노령과 풍상을 이기지 못해 말라 죽고 나머지 소나무도 고사 직전까지 갔다. 상황을 보다 못한 마을주민들은 1993년 여름부터 당산등 가꾸기 사업을 전개했다. 인근 논의 흙을 가져다 복토하고, 당산등으로 가는 길을 포장하고 계단을 조성했으며, 석축을 쌓고 제단을 조성하고, 주변에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벤치를 설치했다. 이는 마을주민과 출향인사 그리고 달성군의 지원으로 가능했다. 지금도 이곳 치마거랑 당산등에서는 정월대보름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낸다.     

 

2) 쌍계서원터·조한정터·영귀암터

지난 2019년 7월 6일 유네스코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된 달성 도동서원. 동방오현 중 수현으로 손꼽히는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기리는 유서 깊은 서원이다. 그런데 도동서원의 전신인 쌍계서원이 이곳 치마거랑 초곡천변에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도동서원은 1568년(선조 1) 이곳 쌍계리 치마거랑 초곡천변에 세워진 쌍계서원에서 출발했다. 1573년(선조 6) 쌍계서원으로 사액을 받았고,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에 의해 소실됐다. 이후 1604년(선조 37)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보로동서원이란 이름으로 중건, 1607년(선조 40) 도동서원으로 사액을 받아 현재에 이르렀다. 김굉필 선생의 문집인 ≪경현록≫에는 쌍계서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무진년(1568)에 현풍의 선비들이 선생을 위하여 읍내에서 동쪽으로 2리쯤 되는 곳에 서원을 세우고 사당을 세웠으니, 정당은 중정이요, 좌실은 동익이요, 우실은 서익이요, 동재는 거인이라 하고, 서재는 거의라 하였다. 또 구용료·구사료·사물료·삼성료가 있고 또 양정재가 있어 어린 학생들을 가르쳤고, 문은 환주라 하였다. 시내 위에다 장차 정자를 지어 명칭을 조한이라 하려고 하였으니 선생의 ‘지호명월조고한’이란 시에서 따온 것이다. 앞에 두 시내가 동쪽과 북쪽으로부터 흐른 까닭에 명칭을 쌍계서원이라 하고…

한편 조한정터는 마을에서 구천을 따라 동쪽에 있었던 동부마을 남쪽 시냇가에 있었으나, 테크로폴리스 조성사업으로 사라졌다. 또한 조한정 아래에는 영귀암이라 불리는 너럭바위도 있었는데 1950년대 말 낙동강 호안공사 초석용으로 반출되어 역시 사라지고 없다. 쌍계반석으로도 불렸던 너럭바위는 가로×세로 길이가 약 5×6m, 높이 4m로 반출 당시 구천변의 다른 돌들과 함께 6톤 트럭 수 십대에 나눠져 실려 나갔다고 한다. 영귀암이란 이름은 선비들이 이곳에서 소요하고 시를 읊은 것에 유래한 것으로 앞서 소개한 풍영대와 유래가 같다. 

    

3) 금화사와 용화사

치마거랑 마을 서편 지금의 달성 디지스트 종합체육관과 축구장이 있는 일대를 예전에 ‘탑골’이라 불렀다. 1982년 봄 농토개간을 할 때 이 일대에서 대웅전·돌탑·요사채터 등 대규모 절터가 발견됐다. 이 절터는 ≪교남지≫ 현풍군 사찰조에 나타나는 금화사(金化寺)터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교남지≫에는 ‘금화사는 현풍군의 동쪽 5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는 기록만 있어 정확한 내력은 알 수 없다. 또한 ≪현풍읍지≫에 ‘절을 철거하여 향교 건물 및 관아, 서원 등을 건립했는데 재목과 탑돌까지 가져가고 지금은 옛 자리만 남아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절 역시 금화사로 보고 있다. 현재 현풍향교는 대성전 기단부를 비롯한 많은 석조구조물이 사찰의 배례석·탑부재 등으로 되어 있는데, 금화사의 것을 가져다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치마거랑 마을 동쪽 동부마을 구천변에 용화사라는 절도 있었는데 테크노폴리스 조성사업으로 최근 자리를 조금 옮겨 다시 중창했다.

4) 쌀뜨물과 중간골

치마거랑 마을에는 유적만큼이나 흥미로운 전설도 많다. 금화사와 관련해 ‘낙동강까지 흘러간 쌀뜨물’ 전설이 있다. 당시 금화사의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쌀을 씻으면 구천을 허옇게 덮은 쌀뜨물이 현풍읍내를 지나 낙동강까지 흘러갔다는 전설이다. 또 다른 전설로는 ‘가는 중은 봐도 오는 중은 못 봤다’는 중간골 전설이 있다. 아주 먼 옛날 마을 뒤 중간골에 엄청 큰 괴물 독거미가 살았는데 골짜기를 지나는 중이란 중은 다 잡아 먹어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골짜기로 들어가는 중은 봤으나 돌아오는 중은 못 봤다고 해서 ‘중이 간 골짜기’란 뜻에서 중간골이라 했다는 것.   

5) 에필로그

우리가 살고 있는 달서구·달성군 관내에는 아직도 치마거랑 마을 같은 전통마을이 꽤 많이 남아 있다. 특히 달성군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매우 특별한 지역이다. 쌍계마을은 1990년대 후반, 마을에 산재한 유적지에 표지석을 세우고, 2000년 ≪쌍계마을지≫를 편찬해 마을의 전통문화와 유적을 정리해 기록으로 남겼다. 만약 이러한 작업이 없었다면 지금의 쌍계마을은 도시화에 뒤쳐진 시골 작은 마을로 전락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쌍계마을지≫를 편찬했던 그 분들이 참 고맙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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