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뜻글자인 한자와 소리글자인 한글. 이 둘은 각자 묘한 매력과 특징이 있다. 한자는 많은 내용을 한 두 글자로 요약할 수 있는 함축성, 한글은 모든 소리를 소리 나는 대로 자유롭게 표기할 수 있다. 향토사에서 이 둘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분야가 있다. 바로 옛 지명이다. ‘치마거랑’·‘장군만댕이’·‘여랫들’·‘현내들’·‘중간골’·‘돋을양지’·‘푸실’ 등등. 이런 옛 지명들은 한자화과정을 거치면서 대부분 한자명으로 교체되었지만,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시골 자연부락에서는 옛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예가 많다. 신기한 일이고 다행한 일이다. 이번에는 2회에 걸쳐 유가읍 쌍계리 치마거랑 마을에 산재한 유적에 대해 알아보자.
2) 구천과 초곡천이 합류
비슬산 서쪽 끝자락 유가읍과 현풍읍이 만나는 경계에 쌍계리라는 마을이 있다. 지금의 달성 디지스트(DGIST)와 테크노폴리스 아파트 단지 사이에 낀 전통마을이다. 쌍계(雙溪)라는 지명은 글자 그대로 두 시냇물이 만난다는 뜻. 초곡리[푸실]에서 내려오는 초곡천과 비슬산에서 내려오는 구천[현풍천]이 이 마을에서 만난다. 유가읍 쌍계1·2리 중 1리는 다른 말로 ‘치마거랑’ 마을이라 불린다. 마을명이 독특하면서도 친근하다. 치마거랑의 유래에 대해 ≪쌍계마을지≫와 ‘풍영대복원비’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 지형이 말이 달리는 형상을 하고 있는 치마산의 치마(馳馬)와 마을 앞 거랑(渠 蒗)을 합하여 ‘치마거랑’이라 부르다가 조선 초기에 구천과 초곡천이 합류하는 곳 즉 쌍계라 하였으며…(쌍계마을지)○ 말이 달리는 형국을 하고 있는 치마산 꼬리 부분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치마꼬랑(尾)이라 불렀으며 그 후 치마산의 치마와 거랑을 승[이어]하여 치마거랑이라 부르다가…(풍영대복원비)
유래를 보니 뜻밖에도 치마거랑은 한글명이 아닌 한자명이다. 그럼에도 한글이름처럼 정겹게 느껴지는 것이 참 매력 있다. 쌍계리에는 지금도 정겨운 옛 지명들이 많이 남아 있다. 치마거랑·중간골·고양내[돋을양지]·탑골·서재도랑·당산등·쓰리목·달불터 등등.
3) 1634년 풍영대에 모인 선비들
치마거랑 마을을 북에서 남으로 관통하는 그리 길지 않는 초곡천변에는 의외로 많은 유적이 산재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 한 두 개만 꼽으라면 도동서원의 전신인 쌍계서원터와 풍영대 각석을 들 수 있다. 쌍계서원터는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고 풍영대 각석에 대해 먼저 알아보자. 쌍계서원터에서 초곡천을 따라 북쪽으로 약 100m 지점에 제법 큰 규모의 바위절벽이 있다.[현재 일부 붕괴된 상태다] 이 바위절벽 한편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풍영대 각석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86년 전인 1634년(인조 12)에 새긴 바위글씨다. 풍영대 각석의 내력을 요약해보면 이렇다.
동명 김세렴이 1632년(인조 10) 현풍현감으로 왔다. 그는 현풍학규와 현풍향약을 제정해 시행했는데 그 성과가 뛰어나 조정에서 다른 고을로의 전파를 명했을 정도였다. 그는 현풍관아에서 지척 거리인 치마거랑마을 초곡천변 풍영대를 즐겨 찾았다. 경치도 경치였거니와 도동서원의 전신인 쌍계서원터·조한정터·영귀암 등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1634년 5월 16일, 그는 고을 선비 12명과 함께 풍영대에 올라 시회를 즐겼다. 그리고 시회를 기념하는 뜻에서 풍영대 바위 한 곳에 ‘풍영대(風詠臺)’ 세 글자를 새기고 그 아래에 시회에 참석한 13인의 명단을 새겼다.
그런데 1980년대 풍영대 절벽 중 일부가 붕괴되는 일이 있었다. 이때 풍영대 각석도 함께 무너졌다. 이에 1988년 5월 마을주민과 달성군이 힘을 합쳐 무너진 풍영대 각석을 다시 세우고, 각석 앞에 풍영대 내력을 새긴 ‘풍영대복원비’를 세웠다. 현재 풍영대 각석은 상부의 ‘풍영대’ 세 글자와 김세렴의 성명·호·자를 새긴 부분은 일부 훼손된 상태며, 나머지 12인의 명단은 대부분 확인이 된다. ‘김세렴·나이준·김대용·김선영·곽홍연·곽홍장·조함세·김시준·곽태원·박동형·곽의창·허암·박형용’[복원비문에는 박형용이 곽형용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풍영’과 ‘영귀’는 논어 선진편에 나오는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에서 바람 쐬고[풍] 노래하면서[영] 돌아온다[귀]’는 구절에서 가져온 말이다.
4) 끊어진 용맥을 다시 잇다
치마거랑 마을 뒷산에는 ‘장군만댕이’라 불리는 봉우리가 있다. 비슬산 서쪽 지맥 끝자락인 이 봉우리는 남쪽으로 1km쯤 더 내려와 치마거랑 마을 당산목이 있는 당산등에서 끝이 난다. 예로부터 이 마을에서는 장군만댕이의 정기를 이어받은 인물과 장군이 난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장군만댕이와 당산등을 잇는 산줄기의 허리부분을 싹둑 잘라버렸다. 풍수지리설에서는 지기(地氣)가 흐르는 산줄기를 용(龍)이라 하고, 그 용맥이 끝나는 지점을 혈(穴)이라고 한다. 우리가 통상 묏자리·집터·마을터와 관련해 명당이라 칭하는 곳이 바로 혈자리다. 풍수로 보면 치마거랑 마을은 치마산 장군만댕이의 정기가 내려와 맺힌 혈자리 명당인데, 일제가 그것을 알고 치마산혈 용맥을 잘라버린 것이다. 치마산혈이 잘린 위치는 치마거랑 윗마을인 고양내 서편 산줄기로 풍영대에서 북쪽으로 약 200m지점이다. 그런데 치마혈이 절단되고부터는 비만 오면 풍영대 아래 초곡천에 붉은 물이 흘렀고, 마을출신 인물들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예가 영화 ‘빨간 마후라’의 실제 인물인 유치곤 장곤이다. 유장군은 장군진급 3일을 앞두고 갑자기 쓰러져 1965년 1월 1일 장군진급특명이 발표되는 날 순직했다. 이처럼 마을에 좋지 않은 일들이 이어지자 주민들은 잘린 산줄기를 다시 잇기로 했다. 1997년 2월 2일 산줄기를 다시 복원하고 그 자리에 이런 내력을 기록한 ‘치마산혈복원비’를 세웠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치마산혈복원 2년 후 마을에서 박사가 났고, 3년 후 유치곤 장군이 호국의 인물로 지정되는 등 마을에서 다시 인물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다음호에 계속>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