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벚꽃이 한창이다. 달성군 다사읍 박곡리 벚꽃길도 최근 들어 눈에 띄게 찾는 이가 많아졌다. 다사읍 박곡리·달천리·이천리는 북쪽으로 마천산, 남쪽으로 금호강을 끼고 있는 강변마을이다. 마천산[275m]은 하빈면과 다사읍을 경계 짓는 이 지역 주산. 주능선이 해발 200m 내외라 가볍게 트레킹을 즐기기에 좋은 산이다. 수년 전 이곳에 마천산 산림욕장이 조성돼 이맘때면 벚꽃놀이, 금호강변 드라이브를 겸해 한 번 다녀올 만하다. 조선시대 이곳 마천산에 봉수대가 있었다. 이번에는 마천산 봉수대터에 대한 이야기다.
2) 목마른 말이 물 마시는 형국, 마천산
마천산(馬川山). 말과 물이 만나는 산이다. 이런 식의 이름은 십중팔구 풍수지리설에 연유한 이름이다. 풍수에서 터를 보는 방법에는 크게 이기론과 형국론이 있다. 이기론은 패철[나침반]을 사용하여 산과 물의 방위를 따지는 것이요, 형국론은 산과 물의 모양을 보는 것이다. 풍수에서는 마천산을 ‘갈마음수형국’이라 한다. 금호강과 낙동강을 끼고 있는 마천산의 지형지세가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위성사진을 보면 정말 그렇다. 영락없이 북동쪽 칠곡 방향에 꼬리를 두고 남쪽 낙동강으로 고개 숙여 물을 마시는 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인공위성·헬기가 없던 시절, 하늘에서 내려다본 마천산의 모습을 어떻게 이처럼 정확하게 이해하고 멋진 이름을 붙일 수 있었는지 선조들의 혜안이 놀랍다. 마천산은 ≪동국여지승람≫에는 금성산(錦城山), ≪대구읍지≫에는 금산(錦山)으로도 나타나며 일부 지도에서는 성산(城山) 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마천산 산명과 관련해 재미있는 전설이 하나 전한다. 아주 먼 옛날 한 장수가 타던 말 발자국이 남아 있어 마천산이라 했다는 전설이다. 또 마천산은 1,000여 년 전 고운 최치원 선생의 유적으로 알려진 ‘선사암’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3) 최전방 관측소+통신기지
남북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휴전선은 물론 동·서·남해안에도 군·경에서 운영하는 관측소·통신대·레이더기지·초소 등이 있다. 이 시설들은 적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은폐·엄폐하면서도 반대로 주변 시계를 확보할 수 있는 곳에 자리한다. 대표적인 곳이 산봉우리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때부터 봉수제도가 시작되어 조선말까지 운용됐다. 봉수(烽燧)제도란 전국 각지에 봉수대를 설치하고 약속된 신호체계를 통해 변방의 상황을 도성으로 전파하는 제도다. ‘烽’ 자는 ‘火’와 ‘ ’, 즉 산봉우리의 불이요, ‘燧’는 ‘火’와 ‘遂’, 불을 피워 올린다는 의미다. 이처럼 봉화를 피워 올리기 위해 산봉우리에 설치한 대를 봉수대라 한다. 전국에 산재한 봉수대는 크게 경봉수·내지봉수·연변봉수 세 가지로 분류한다. 경봉수는 전국에서 올라온 봉수가 집결하는 서울 남산에 있는 봉수. 연변봉수는 국경·해안에 있는 봉수. 내지봉수는 이 두 봉수를 연결하는 내륙 봉수다. 변방의 상황은 ‘연변봉수→내지봉수→경봉수’ 라인을 통해 도성에 전달됐으니, 연변봉수는 최전방 관측소, 내지봉수는 통신 중계소, 경봉수는 합참본부 상황실쯤 되는 셈이다. 봉화와 연기를 이용한 신호체계는 모두 5가지로 밤에는 횃불, 낮에는 연기를 이용했다. 기상조건에 따라 시계가 불량할 때는 북·나발·불화살·깃발 등을 사용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봉수군이 다음 봉수까지 직접 가서 상황을 전파하기도 했다. ‘거화제’라 칭하는 신호체계는 내륙과 해안이 조금 달랐다.
자료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1895년 봉수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는 약 750개의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고장에는 논공 소이산 봉수대·가창 삼산 봉수대·화원 성산 봉수대·다사 마천산 봉수대 4곳이 있었다. 마천산 봉수대는 남쪽으로 화원 성산 봉수대, 북쪽으로는 칠곡 각산 봉수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천산 봉수대의 정확한 위치를 두고 논란이 있다. 이천고개[마천현] 북쪽 이천리와 남쪽 부곡리에 있는 두 곳의 추정지를 두고 아직 최종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다. 학계·전문가 그룹과 향토사학자·현지인들의 주장이 서로 상충하고 있기 때문이다.
4) 봉수대 구조
현재 우리나라에 옛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봉수대는 전무하며 복원된 봉수대 역시 극소수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그나마 복원된 봉수대도 복원이 잘못됐다고 한다. 대부분 복원 봉수대는 수원화성 봉수대인 봉돈을 모델로 복원했는데, 수원화성 봉돈과 지방 봉수대는 근본적으로 규모와 구조가 달랐다는 것이다. 하긴 임금을 위한 행궁으로서의 수원화성 봉돈과 시골 봉수대 모양이 같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방 봉수대의 모습은 어땠을까. 봉수대는 크게 중심시설과 보조시설로 나뉜다. 중심시설은 봉화와 직접 관련이 있는 시설로 연조[굴뚝·5개]·망대·방화벽·연료창고 등이며, 보조시설은 주거지·창고·경작지·우물 등이다. 요즘으로 치면 중심시설은 관측소요, 보조시설은 관측소에 딸린 군 막사 정도가 된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내지봉수에는 봉수군 6명, 오장 2명이 상·하 2개조로 나눠 10일마다 교대근무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지역마다 인원수에는 차이가 있었다.
5) 에필로그
조선시대 주요 산봉우리와 해안가에 봉수대가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해안가와 높은 산봉우리에는 군·경의 관측소·레이더기지·통신대가 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무전기 교신 최대도달거리가 30㎞인데, 조선시대 봉수대간의 거리가 평균 10-20㎞ 내외이고 아무리 멀어도 30㎞를 넘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쪼록 마천산 봉수대가 빨리 복원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