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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11. 초곡산성과 팔장군묘
  • 푸른신문
  • 등록 2020-04-0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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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지난번 석문산성에 이어 이번에도 산성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기로 하자. 우리고장은 지리적으로 비슬산과 낙동강을 끼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큰 산과 강은 지역경계 혹은 국경이 되곤 했다. 5-6세기 경 신라에 복속된 것으로 알려진 우리고장은 서쪽 낙동강을 경계로 강 건너 고령 대가야와 대치했다. 그런 만큼 문산리·죽곡리·성산리·설화리·도동리 같은 낙동강변 구릉지는 신라의 최전방 전초기지역할을 했다. 이 지역에 산성이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번에는 낙동강변에서 조금 떨어진 비슬산 자락에 위치한 초곡산성과 그 주변에 있는 양리고분군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2) 산성과 고분군


마한·변한·진한으로 대표되는 삼한시대에는 수많은 성읍국가[소국]가 존재했다. 성읍국가 유적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성과 고분이 서로 인접해 있다는 점이다. 대구의 경우 달성토성과 달성고분군, 봉무토성과 불로고분군, 팔거산성과 구암고분군 등이 대표적이다. 우리고장에는 문산리산성과 문산리고분군, 죽곡산성과 죽곡리고분군, 화원토성과 성산리고분군, 설화리산성과 설화리고분군, 성하리 서산성과 성하리고분군, 초곡산성과 양리고분군 등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성과 고분이 한 세트를 이룬 것은 성읍국가들이 구릉지를 군사적 목적의 산성과 시신 매장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성과 고분군은 당시 성읍국가의 규모나 위상을 알아보는데 있어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현재 우리 고장에는 낙동강변을 따라 10여개의 산성과 고분유적이 남아 있다. 대부분 4-5세기 경 조성된 것으로 서로 반경 5km내외의 간격을 두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3) 초곡·와우·양리·과녀성·성말랭이


현풍·유가권역에서 ‘성말랭이’로 불리는 곳이 있다. 유가읍 초곡리와 양리의 경계가 되는 와우산[670m] 정상부에 있는 산성을 일컫는 말이다. 2008년 대구시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된 이 산성은 특이하게도 이름이 여러 개다. 대표명칭인 초곡산성·와우산성 외에도 양리[양동]산성·과녀성·와와산성 등으로도 불린다. 초곡산성이란 이름은 산성 남서쪽에 있는 초곡마을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초곡은 ‘푸실’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풀이 우거진 골짜기 초곡(草谷)의 순우리말이다. 양리[양동]산성은 산성 남동쪽 양리[양동]마을에서 유래됐다. 와우산성과 와와산성은 산 모양에 따른 이름으로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소[우]나 개구리[와]가 누워있는[와] 형국이란 뜻으로 풍수지리설과 관련 있다. 과녀성(寡女城)은 과부가 쌓은 성이란 뜻인데 ≪현풍읍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과녀성은 삼국시대 때 한 과부가 분연히 뜻을 세워 성을 쌓아 적을 방어했다’. 말하자면 전쟁으로 남편을 잃는 과부들이 성을 쌓았다는 뜻이다. 부녀자들이 행주치마에 돌을 담아 날랐다는 행주대첩 스토리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초곡산성은 와우산 정상 8부 능선을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길쭉한 타원 형태로 둘러싼 석성으로 성벽 둘레 약 1.7km, 성벽 높이 약 5-7m쯤 된다. 초곡산성에서는 현풍·유가·옥포·논공 일대를 한눈에 다 조망할 수 있다. 그야말로 현풍권역 최고의 군사요충지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초곡산성에는 곽재우 장군에 얽힌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진다. 임란 때 곽재우 장군이 초곡산성과 대니산 석문산성을 잇는 줄을 설치하고, 그 줄에다 허수아비 장군을 매달아 허수아비가 바람을 타고 산성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게 했다. 이를 본 왜군이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는 허수아비 장군의 모습에 놀라 도망갔다는 전설이다.


4) 양리고분군


양리고분군은 초곡산성에서 남쪽으로 초곡리와 양리를 경계 지으며 뻗어 내린 능선과 그 주변부에 산재한 고분군이다. 양리고분군은 여타 고분군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특징이 하나 있다. 고분의 수가 엄청나다는 점이다. 2005년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조사결과 양리고분군의 고분 수는 대·소형 고분을 포함해 모두 675기나 된다. 이중에는 지름 20-30m, 높이 4-6m에 이르는 대형 고분 8기가 있는데 세칭 ‘팔장군묘’라 불리는 고분이다. 그런데 팔장군묘를 비롯한 양리고분은 대부분 도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0-70년대 전문도굴꾼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도굴됐다고 알려져 있지만, 현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미 도굴이 시작됐다고 한다. 또한 1970년 대 초 한 재력가가 마을주민을 동원해 고분을 파헤쳐 4t트럭 2대 분량의 유물을 가져갔다는 말도 있고, 한때 국보 제138호 금관이 대가야고분이 아닌 이곳 양리고분에서 나온 것이라는 풍문도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양리고분에서 대가야 양식 유물이 많이 나왔다는 점이다. 이를 근거로 현풍일원이 한 때 대가야 세력권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신라에 복속되기 전인 5세기 이전 현풍은 가야와 신라문화가 공존했고, 신라 복속 이후 본격적으로 신라문화가 정착되었다는 주장도 있는 등 아직까지는 이견이 분분하다.
      
5) 에필로그


대구 동구 불로동고분군[사적262]에 이어 지난 2018년 북구 구암동고분군이 국가사적 제544호로 지정됐다. 고분 수는 불로동고분군이 210여기, 구암동고분군이 379기다. 이에 비해 양리고분군은 2005년 조사결과 기준으로 고분 수가 무려 675기나 된다. 그래서 말인데 초곡산성과 양리고분군을 묶어 관광자원으로 개발한다면 대박이 날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과녀·팔장군·곽재우·금관 등 흥미로운 스토리까지 갖추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뒷산은 산전체가 고분 밭이었어. 대부분 봉분 없이 몇 개의 돌판으로 구덩이를 덮어놓았지. 그런데 이상한 게 구덩이의 방향이 상하 일자형이 아니고 좌우 한일자형이었어. 밤중에 촛불을 켜놓고 팔장군묘를 도굴하다가 금붙이에 반사된 불빛에 놀라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이도 있어. 저 아랫마을 사람이야. 그 집 아들을 한번 찾아가봐”(양1리 주민 증언)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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