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도 한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유명한 전투사에는 바다·강·성이 등장한다. 중국처럼 국토가 넓고 산이 적은 곳에서는 관도대전·적벽대전·이릉전투처럼 평원이나 강. 우리나라처럼 산이 많고 삼면이 바다인 곳에서는 한산도대첩·진주성대첩·행주산성대첩처럼 바다나 성, 특히 산성이 주무대가 된다. 이번에는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쌓은 것으로 알려진 현풍·구지 대니산 석문산성에 대해 알아보자.
2) 산성의 나라 한국
성은 특정지역을 구획 짓고 방어하기 위한 시설물이다. 수도에 설치한 도성, 지방에 설치한 읍성, 군사요충지인 산에 설치한 산성 등이 대표적이다. 평상시 백성들은 성 안팎을 오가며 생활을 하다가 전쟁이 발발하면 성안으로 들어간다. 성을 요새 삼아 전투를 치르는 것이다. 국토의 70% 이상이 산인 우리나라는 산성이 많다. 한 자료에 의하면 남한에만 약 1,200개의 산성(터)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산성의 나라’라고도 칭한다. 우리나라 산성의 역사는 삼국시대 초기부터 시작됐다. 산성의 재료는 나무·흙·돌·벽돌 등인데 초기 형태는 나무울타리를 이용한 목책형 산성이었다. 삼국·고려시대에는 흙을 재료로 한 토성이, 이후 조선시대에는 돌을 사용한 석성이 주류를 이뤄 조선후기까지 지속됐다. 산성은 둘레가 100m 이하인 소규모 산성도 있고, 10km가 넘는 대규모 산성도 있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 산성으로 알려진 부산 금정산성은 둘레가 17km에 이른다. 산성 유형은 테뫼식과 포곡식이 있다. 테뫼식은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산정상부를 중심으로 그 둘레에 성을 쌓은 것으로 산[뫼]에 테를 둘렀다는 뜻이다. 이에 비해 포곡식은 산 아래 계곡에서부터 산정상부까지 성을 쌓은 것으로 계곡[곡]을 감싸 안았다[포]는 뜻이다. 규모가 큰 산성은 산성 내에 농경지·우물·저수지·창고 등을 두었는데 이는 장기 농성전을 대비한 것이다. 우리 고장 산성으로는 문산리산성·죽곡리산성·성산리 화원토성·설화리산성·석문산성·초곡산성[와우산성] 등이 있다.
3) 곽재우 장군이 쌓다가…
우리 고장에는 임란의병장 곽재우 장군이 쌓은 것으로 알려진 산성이 몇 개 있다. 석문산성과 초곡산성이다. 대개의 산성이 그렇듯 이 두 산성 역시 삼국시대 조성된 산성을 임란 때 다시 보수했다고 보면 된다. 이 중 곽재우 장군과의 관련성이 확실한 산성은 석문산성이다. 곽재우 장군 신도비문과 ≪증보문헌비고≫, ≪현풍읍지≫ 등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 정유년 가을 공은 방어사가 되어 석문산성을 쌓다가 완성하지 못한 즈음 왜적이 도착했다는 소문을 듣고 화왕산성으로 이동하여 수비하려 했는데 성에 들어가자마자 적군이 이미 도착했다. (곽재우 장군 신도비문)
○ 석문성이라 부르며 서남쪽으로 20리에 있다. 선조 30년 왜란에 곽재우가 옛 성터라 하여 고쳐 쌓았는데, 둘레 2,759척, 높이 6척이다 (증보문헌비고, 현풍읍지)
석문산성은 현풍·구지 대니산에 있다. 좀 더 정확히는 대니산 서쪽 끝자락인 진등산과 석문산에 걸쳐 있다. 낙동강에 접해 있는 이 두 산은 그 사이에 도동 2리 절골 골짜기를 끼고 있어 산성의 전체적인 형태는 ‘∩’형 포곡식 산성이다. 그런데 석문산성은 미완성 산성이다. 곽재우 장군이 산성을 다 쌓지 못한 상태에서 화왕산성으로 군대를 이동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일부 구간에는 성벽이 남아 있으며, 건물지·망대·문지 등의 흔적도 확인된다. 참고로 1989년 묘이장 과정에서 미라 및 남편 곽주와 주고받은 167매의 한글편지가 발견된 ‘진주하씨부인묘’도 이곳 석문산성 내에 있었다.
4) 석문산성 입구 아들바위, 딸바위
대개 산성 성문은 골짜기에 숨어 있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또 산성 성문은 다른 성벽보다 튼튼하게 조성한다. 험한 산지에 위치한 탓에 아군이든 적군이든 산성은 기본적으로 성문을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하다. 그 만큼 성문이 중요하기 때문에 골짜기에 숨기고 또 튼튼하게 만드는 것이다. 석문산성 주출입구는 도동2리 절골마을 뒤편 골짜기에 있다. 그런데 석문산성 성문은 돌을 높이 쌓고 그 아래에 ‘∩’ 형 출입구를 낸 형태가 아니라 자연지형지물을 그대로 이용한 성문이다. 절골에서 골짜기를 따라 300m쯤 들어가면 좁은 골짜기 계곡 중앙에 거대한 바위 2개가 20여m 간격을 두고 위아래에 서 있다. 이 바위를 지나 20-30m쯤 더 들어가면 좌우로 바위벼랑이 높이 치솟은 협곡이 나타난다. 이 협곡이 석문산성 주출입구인 성문이다. 좌우에서 빗장을 걸 듯 골짜기를 막고 서 있는 바위협곡은 그 사이 틈이 채 2-3m도 안 된다. 게다가 석문 아래에 높이 6-7m, 폭 5-6m가 넘는 거대한 바위 2개가 마치 석문을 지키는 초병처럼 서 있다. 그야말로 자연이 빚은 천연 바위문[石門]이다. 석문산성이란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됐다. 석문 바로 아래 두 바위는 아들바위, 딸바위라 불리는데, 예로부터 치성을 드리는 영험한 바위로 알려져 있다. 아들을 원하면 아들바위에 딸을 원하면 딸바위에 치성을 드렸다.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지금도 바위 옆 계곡에서는 촛불기도가 행해진다. 현풍·구지권역을 통틀어 이렇게 큰 규모의 바위가 그것도 2개가 인접해 있는 곳은 이곳 석문산성입구가 유일하다.
5) 에필로그
절골은 한자로 사곡(寺谷)이라 표기한다. 말 그대로 절이 있는 골짜기란 뜻. 옛날 석문산성 입구에 절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때인가 연못으로 변했다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는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한편 예전에는 현풍-창녕 국도변에 고인돌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이 고인돌에도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곽재우 장군이 석문산성을 쌓다가 중도에 화왕산성으로 군대를 이동할 때의 일이다. 화왕산성 축성에 사용하려고 곽장군이 말채찍을 휘두르며 이 돌들을 몰고 가던 중, 전쟁이 끝나 길가에 내버려 둔 것이라는 전설이다. 이 전설은 고인돌 관련하여 우리나라 전역에서 발견되는 대표 텍스트다. 심지어 중국 만리장성을 쌓기 위해 돌을 가지고 가던 중, 성이 완성됐다는 소식을 듣고 돌을 내버려둔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도움말(곽정섭, 69세, 구지면 오설리)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