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달성군 논공읍 하리 약산마을. 약산(藥山)이란 이름에 걸맞게 이 마을은 예로부터 약초가 많이 났다. 그래서일까. 10여년 전만에도 이 마을 입구 약산온천은 물 좋기로 소문나 대구시민이 즐겨 찾는 온천이기도 했다. 약산마을은 파평윤씨 판도공파 판관공 논공문중의 400년 세거지다. 이 마을에는 현재 3개의 재실과 1개의 정려각이 있다. 이번에는 이중 파평윤씨 논공문중 재실인 응산재·부강정과 함께 논공문중에 얽힌 기이한 전설에 대해 알아보자.
2) 파평윤씨 논공문중과 ‘배씨 처녀의 화’
왕건을 도와 고려개국과 후삼국통일에 기여한 고려통합삼한익찬공신 윤신달을 시조로 하고, 고려 때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 9성을 개척한 윤관을 중시조로 하는 파평윤씨. 자타가 인정하는 고려·조선조 명문가다. 이중 고려 말 판도판서를 지낸 윤승례의 증손자인 판관 윤귀년의 후손 문중이 약산·덧재마을 파평윤씨 논공문중이다. 이 문중은 본래 낙동강 건너 지금의 고령 상곡에 세거했던 이름난 문중이었다. 그런데 세칭 ‘배씨(裵氏) 처녀의 화(禍)’로 인해 고향 상곡을 떠나 약산에 터를 잡았다. 흥미롭기도 하고 기이하기도 한 ‘배씨 처녀의 화’는 지역사회에서 오랜 세월 구전되고 있는 이야기다.
400여 년 전 고령 상곡 땅에 윤씨들이 살았다. 이중 3대가 벼슬을 한 집이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진사, 아버지는 부장, 아들은 한림을 지냈다. 어느 날 이 집의 한림공 윤도령이 낙동강 건너 용연사로 나들이를 갔다가 설화마을에서 소나기를 만났다. 윤도령은 그 마을 배동지라는 천석꾼 집에 잠시 머물며 비를 피했다.[배동지가 역참에서 일하는 천한 신분이라는 설도 있다] 그런데 그날 이후 배동지의 18세 무남독녀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온갖 약을 다 써보았지만 딸의 병세는 더욱 심해졌다. 딸의 병은 얼마 전 소나기를 피해 자신의 집에 잠시 머물렀던 윤도령을 사모하는 상사병이었다. 배동지는 딸을 살리기 위해 강 건너 고령 상곡의 윤도령집을 찾아 청혼을 했지만, 윤씨네에서는 일언지하 거절을 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딸은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 강 건너 상곡의 윤씨 마을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밤마다 소복을 입은 처녀귀신이 나타나고, 소나 말이 죽고, 사람들까지 하나 둘 죽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 괴변의 원인이 배씨 처녀의 원한 때문이라 생각한 윤씨네는, 화를 피하기 위해 낙동강 건너 100리 밖 칠곡 소학산자락으로 피신을 했지만 화는 계속 이어졌다. 그러자 윤씨네는 또 다시 100리를 옮겨 이번에는 배씨 처녀가 살던 설화인근 약산으로 피신, 배씨 처녀의 원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자 괴변이 사라졌다. 그 후 약산에 터를 잡은 윤씨네는 매년 배씨 처녀의 원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냈다.
3) 약산마을 응산재와 덧재마을 부강정
약산마을에는 자연부락이 두 곳인데 약산과 덧재다. 서쪽 낙동강 쪽이 약산, 동쪽 산골짜기 쪽이 덧재[가현리]다. 파평윤씨 약산 입향조는 운강(雲江) 윤홍(尹弘). 그는 ‘배씨 처녀의 화’로 아버지 윤대승을 비롯한 일가친척 대부분을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1500년대 후반 약산에 정착했다고 한다. 응산재(鷹山齋)는 약산 파평윤씨 문중 재실 및 강학소로 1928년 문중에서 건립했다. 응산이라는 이름은 부응산(浮鷹山)이란 이 지역 산 이름에서 취했다. 흙돌담에 둘러싸인 응산재는 정면 4칸 측면 1.5칸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 좌우 각 1칸은 방이며 전면으로 반 칸 퇴 칸을 뒀다. 대청에는 응산재·부양헌·응산재기·시판 등이 걸려 있으며, 경내에 부속채가 한 채 있다. 한편 부강정(浮江亭)은 덧재에 있는 정자다. 파평윤씨 논공문중 본래 고향인 고령 상곡에 있던 것을 1948년경 지금의 자리로 이건해 재실로 사용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1.5칸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1칸 대청 좌우 각 1칸은 방이며, 경내에 부속채 한 채가 있다. 그런데 부강정은 파평윤씨 논공문중 내력만큼이나 그 역사가 좀 복잡하다. 대구지역 향토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부강정’을 모르는 이가 없다. 대구 인문역사지리에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닌 정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말하는 부강정은 지금의 덧재마을 부강정과는 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같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4) 신라왕 휴양지 부강정
대구향토사에서 말하는 부강정은 지금의 강정보가 있는 다사읍 강창에 있었던 조선시대 정자를 말한다. 정자 터의 풍광이 얼마나 좋았던지 신라왕이 찾아 노닐던 곳이라는 옛 기록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신라시대 때도 정자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부강정은 앞서 업급한 파평윤씨 약산 입향조 윤홍의 아버지 생원 윤대승(1553-?)이 처음 건립하고 소유했다. 이후 정자는 임란 때 일부 소실되었다가 병자호란 이후 완전히 무너졌다. 이 과정에서 정자의 주인은 윤씨 문중의 사위인 다포 이지화[전의이씨]에게 넘어갔다. 1640년대 후반 다시 중건된 부강정은 1700년대 초·중반을 거치면서 합강정(合江亭)·하락정(河洛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다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1700년대 부강정의 이름이 합강정·하락정으로 바뀐 사실에서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부강정의 원주인인 강 건너 고령 상곡 윤씨 문중에서 상곡에 부강정을 다시 복원하자, 강정에 있던 정자 이름을 부강정 대신 합강정·하락정이라 고친 것이 아닐까. 그래야 1948년 상곡에 있던 부강정을 덧재마을로 이건했다는 사실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5) 에필로그
부강정·부양헌(浮揚軒·응산재 대청에 걸린 편액)·부응산(浮鷹山). 부강과 부양은 물 위에 떠 있다는 의미요, 부응은 매가 허공을 날아오른다는 뜻이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문중은 ‘부’라는 글자에 각별한 의미를 두었던 것 같다. ‘배씨 처녀의 화’를 경험한 논공문중에 대해 필자는 동병상련의 정을 느낀다. 필자 문중 역시 ‘직장(直葬)·횡장(橫葬)의 화’라는 괴변으로 오랜 세거지 성주 가천을 떠나 낙동강 건너 100리 땅인 대구 칠곡 매남으로 옮겨온 문중 내력이 있기 때문이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