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프롤로그
달성군 마비정 벽화마을 가는 길. 천내천을 끼고 있는 이 길은 30-40년 전만 해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특히 천내천의 모습이 그랬다. 과거 천내천은 기암괴석·암반·강돌로 이뤄진 경관이 매우 수려한 계곡이었다. 하지만 수차에 걸친 하천정비사업으로 기암괴석과 암반은 깨뜨려졌고, 그 많던 강돌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결과 용트림하듯 상하좌우 곡류했던 천내천이 지금은 죽은 뱀 마냥 힘없이 축 늘어진 시내가 됐다. 하지만 지금도 옛 천내천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간직한 곳이 있다. 인흥마을에서 마비정 방향으로 700m쯤 가면 나타나는 ‘들럭소(沼)’다. 푸른빛이 감도는 암반 위를 지그재그 흘러내리는 계곡물 그리고 작은 폭포와 소. 옛 사람들은 이런 공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천내천 들럭소 가에 있는 동계재(東溪齋)에 대한 이야기다.
2) 한강 정구와 동계재 3문중
동계재 이야기는 한강 정구와 동계재 3문중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약 400년 전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 동계정의 창건유래에 정구와 함께 세 성씨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한강 정구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한강 정구[1543-1620]는 성주 출신으로 20대 초에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양 선생 문하에서 공부를 했다. 유일로 천거되어 내외 여러 관직을 거치고 대사헌으로 있던 1608년(광해군 즉위년) ‘임해군 역모사건’ 관련해 상소를 올리고 성주로 낙향했다. 1610년(광해군 2) ‘한강 무고사건’이 일어나자 2년 뒤인 1612년(광해군 4), 70세 나이로 고향 성주를 떠나 칠곡 노곡정사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2년 뒤인 1614년(광해군 6) 1월, 노곡정사의 화재로 평생의 저술과 만권 서책이 한줌의 재가 되는 아픔을 겪었다. 같은 해 그는 72세의 노구를 이끌고 다시 지금의 대구 북구 사수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1617년(광해군 9) 2월 선생 나이 75세 때 사빈서재에서 강학을 하고, 그해 겨울 사양정사를 건립했다. 당시 낙재 서사원·모당 손처눌을 비롯한 대구 선비들은 선생이 사수에 터를 잡기 전부터 이미 성주의 선생 문하에 출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이 대구로 거처를 옮겨 강학을 시작하니 그때부터 대구 문풍은 눈에 띄게 일어났다. 1620년(광해군 12년) 선생은 78세를 일기로 대구 사양정사에서 운명했다. 현재 대구에서 300-400년 세거한 문중 대부분이 선생의 학맥을 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중기 대구 문풍은 한강 선생을 통해 한층 업그레이드 된 후, 조선후기를 거쳐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필자는 한강 선생을 가리켜 ‘대구유학의 중시조’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대구 북구 사수동 한강근린공원에 세워져 있는 ‘한강선생급문제현’[제자록]에는 무려 357명의 제자명단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화원읍 인흥리가 한강 선생의 유적 중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강 선생 제자이자 이 지역과 인연이 있는 3문중이 결의하여 선생을 기리는 서재 한 채 건립했으니 동계재다. 동계재를 중심으로 하는 동계재 3문중은 영동김씨·성주도씨·단양우씨다.
3) 400년 내력을 지닌 동계재
천내천은 다른 말로 인흥천이라고도 한다. 특히 들럭소와 동계재 앞을 흐르는 인흥천은 인흥리 본동의 동쪽에 있다하여 ‘동계’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동계재라는 이름은 여기에 유래한 것이다. 동계재는 최초 건립에 대한 자세한 내력이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동계재 관련 문서를 통해 확인 가능한 가장 오래된 사실은 1686년(숙종 12) 중건이 있었다는 것. 이후 1754년(영조 30) 7칸 규모의 ‘ㄱ’ 자형으로 중건했으며, 1808년(순조 8) 7칸 중 4칸만 다시 중수하고 서쪽에 2칸 별채를 세웠다. 1841년(헌종 7) 기와를 새로 이었으며, 이후 개항기·일제강점기·근대화기를 거치면서 동계재는 퇴락의 길을 걸었다. 4칸 본채와 담장은 허물어졌고, 2칸 별채는 겨우 형태만 유지했다. 2003년 상황의 중대성을 절감한 동계재 3문중은 동계재 중건을 결의했다. 대대로 내려온 동계재 재산 중 일부 전답을 매각하고, 3문중에서 지원금을 쾌척했다. 허물어진 본채는 철거하고 그 자리에 밀양에서 사들인 재실 한 채를 옮겨 세웠다. 또한 별채와 담장을 중수하고 앞 동계에는 다리를 건설했다. 총 사업비 2억 1천여만 원이 들어간 동계재 중수사업은 2008년 말 마무리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동계재는 정확한 창건연대와 창건자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다. 하지만 1686년에 중건이 있었다는 동계재 중수기록과 성주도씨 문중의 주장[취애 도응유 선생이 1606년 건립] 등을 참고하면 동계재의 역사는 짧아도 350년, 길게는 400년이 넘는다.
4) 동계서당·동계서사·한강선생 편액과 시판
들럭소 북편 흙돌담에 둘러싸인 동계정은 솟을대문·동계서재·동계서당 3동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에 해당하는 동계서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서쪽 2칸은 대청, 동쪽 2칸은 방이다. 별채인 동계서당은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 맞배지붕 건물로 2칸 모두 방이다. 동계서당 편액은 한강 선생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편액 아래에 걸린 시판 역시 한강 선생의 시를 새긴 것으로 이 둘의 원본은 월곡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복축동계상(卜築東溪上) 동계 위에 집을 짓고
봉인두북남(逢人斗北南) 사람을 북두의 남쪽에서 만났다네.
원분묘일파(願分茆一把) 원컨대 띠 풀 한 줌 나눠가지고
종로차강담(終老此江潭) 강과 못에서 늙어 간다네.
5) 에필로그
풍광 좋은 곳에 있는 유적을 답사할 때는 주의할 점이 있다. 지금의 눈이 아닌 과거의 눈으로 전체를 조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물가에 있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큰 강물이든 실개천이든 간에 물길은 자연 혹은 사람에 의해 시시때때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계재나 들럭소도 지금이 아닌 과거의 눈으로 바라봐야 진가를 알아 볼 수 있다. 어쨌든 들럭소 없는 동계재, 동계재 없는 들럭소는 서로에게 있어 팥소 없는 진빵이나 다름없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