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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06. 대곡동 소방산 자락 대곡영각과 저존재
  • 푸른신문
  • 등록 2020-02-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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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인류는 존귀한 인물의 행적과 모습을 기록이나 그림으로 남겼다. 기록으로는 행장·언행록·문집 등이 있고, 그림으로는 영정[진영·초상화]이 있다. 우리 고장에도 역사적 인물의 영정이 여럿 있다. 고운 최치원·노당 추적·취금헌 박팽년·백촌 김문기 등. 이번에는 최치원 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달서구 대곡동 대곡영각과 재실 저존재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2) 영정을 봉안한 건물 영각


우리나라 건축물과 서양건축물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목조건축물과 석조건축물이라는 점일 것이다. 한국의 전통목조건축물은 ‘전(殿)·누(樓)·정(亭)·대(臺)·당(堂)·재(齋)·사(舍)·헌(軒)·각(閣)·묘(廟)’ 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 ‘전’은 근정전·대웅전·대성전처럼 왕이나 성인 또는 대신(大神)을 위한 것으로 건축물의 위계상 최상위에 있는 건물이다. 누·정·대는 전망 좋은 곳에 세운 건물로 2층 규모 큰 것을 ‘누’ 또는 ‘대’, 1층 작은 것을 ‘정’이라 한다. 당·재·사·헌은 일반 보통 건물, ‘각’은 어떤 대상물을 보호하거나 봉안하기 위한 건물, ‘묘’는 사당 건물이다. 이중 ‘각’은 좀 특별난 데가 있다. 조선시대 8도 관찰사 관사에 해당하는 징청각처럼 규모가 거대할 수도 있고, 정려각이나 비각처럼 작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규모와는 상관없이 ‘각’이란 이름이 붙은 건물은 일반 건물에 비해 건물의 위계가 높다는 특징이 있다. 그 증거로 ‘각’은 아무리 규모가 작아도 주변에 담장을 두르거나, 혹은 단청을 칠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각’은 다른 건물과는 달리 이름만 보고도 그 용도를 바로 알 수 있다. 사찰에 있는 산신각·독성각은 산신·독성, 정려각·비각은 정려·비, 영정각은 영정을 모시거나 보호하는 건물이기 때문이다.  
   
3) 경주최씨 시조 최치원


우리는 학창시절 최치원(857-?)에 대해 배운바가 있다. 통일신라말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 문신이자 학자이며, 「토황소격문」이라는 글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고. 최치원은 신라인으로 자는 해운, 호는 고운이다. 12세에 국비장학생으로 당나라에 유학. 18세[874년]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당나라 과거시험 빈공과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이후 10년 간 당나라에서 관직생활을 했으며, 특히 ‘황소의 난’ 때 지은 「격황소서」로 이름과 문장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29세 때 고국인 신라로 돌아와 관직생활을 시작, 주로 왕실·고승을 찬양하는 글과 외교문서 작성을 담당했다. 38세 때인 894년 선생은 신라 계혁안을 담은 「시무10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렸고, 그 공으로 6두품 최고위직인 아찬에 올랐다. 하지만 기득권 진골 세력의 반발로 「시무10여조」는 실현되지 못했다. 개혁안 좌절 이후 선생은 세상을 등지고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경주 남산·강주 빙산·합주 청량사·지리산 쌍계사·대구 마천산·안동 청량산·양산 임경대·함양 학사루·군산 자천대·창원 월영대·하동 세이암·합천 자필암·문경 야유암·부산 해운대 등이 선생의 유적이다. 선생은 가야산 해인사에서 생을 마쳤다고 전한다. 하지만 사망연도를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52세였던 908년까지는 생존한 것으로 보고 있다. 908년 선생이 지은 「신라 수창군[지금의 대구] 호국성 팔각등루기」라는 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편 선생이 가야산 신선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는 이인로의 『파한집』 등에서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기록 때문이다.


어느 날 아침 최치원이 일찍 일어나 문을 나간 뒤 간 데를 알 수 없었다. 관(冠)과 신발을 숲 속에 남겨 놓았으므로 신선이 된 것 같다.


4) 대곡영각과 저존재


예로부터 대곡동과 진천동에 다수의 경주최씨들이 세거해왔다. 이들은 경주최씨 대곡 입향조인 매영헌(梅永軒) 최효열(崔孝烈·1563-1622) 선생의 후손들이다. 선생은 본래 경주사람인데 임진왜란 때 왜적의 손에 부인과 자식 그리고 고향땅 잃었다. 이에 ‘고향을 떠나다’란 제목의 시 한 수를 남기고 대대로 살아온 경주 땅을 떠나 지금의 대구 대곡동 소방산 아래에 새 터를 잡았다. 이곳에서 선생은 여생을 매화와 벗하며 처사의 삶을 살았다. 매영헌이란 호도 단을 쌓고 매화를 읊으며 매화와 더불어 오래하겠다는 의미. 400년 내력을 지닌 대곡동 경주최씨 세거지에는 선조를 기리기 위한 추모소가 2곳 있다. 대곡영각과 저존재다. 대곡영각(大谷影閣)은 소방산 자락 대곡소공원에 자리한 영각이다. 대곡 최씨문중에서 자신들의 시조인 최치원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향사를 지내는 영각으로 1973년 준공됐다. 출입문은 겹처마 맞배지붕 솟을삼문 양식으로 ‘고운 선생을 높인다’는 뜻으로 경운문(景雲門)이라 이름 했다. 영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단청이 칠해져 있다. 대곡영각 앞쪽에는 이 마을 최씨문중 입향조 최효열 선생을 기리는 재실 저존재(著存齋)가 있다. ‘저존’은 유교 경전인 『예기』 「제의」에 나오는 ‘사랑을 지극히 하면 혼령이 보존되고, 정성을 다하면 혼령이 드러난다’에서 취한 것이다. 다시 말해 지극정성으로 선조를 받들면 마치 그 혼령이 있는 듯 드러난다는 의미다. 저존재는 선영을 수호하고, 제사를 받들고, 학문을 닦기 위한 공간으로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 문중원들이 힘을 합쳐 세웠다. 흙돌담장에 둘러싸인 저존재는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전면으로 반 칸 퇴 칸을 두었으며, 가운데 2칸은 대청 좌우 각 1칸씩은 온돌방이다.


5) 에필로그


대곡동 뒷산인 소방산은 세칭 삼필봉으로 불리는 이 지역 세 산봉우리 중 가장 북쪽에 있는 봉우리다. 소나무가 많다하여 송봉이라고도 불리는 소방산은 그 이름의 유래가 흥미롭다. 소방산은 한자로 召榜山 혹은 小方山으로 쓴다. 전자는 과거급제자 명단을 기록한 방목(榜目)에 부름을 받는다는 뜻이고, 후자는 그냥 동네 작은 산이란 뜻이다. 전자는 이 지역사람들의 오랜 소망을 담은 이름이요, 후자는 겸양을 나타낸 이름이다. 꿈과 겸손의 산 소방산. 소방산 자락에 사는 사람들이 부럽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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