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필자는 일주일에 한 번 현풍초등학교 앞을 지난다. 매주 화요일마다 도동서원 해설사 근무를 위해 학교 앞으로 출퇴근하기 때문이다. 현풍초등[1906년 개교]은 금년으로 개교 114주년, 대구초등과 함께 대구에서 역사가 가장 오랜 초등학교로 알려져 있다. 긴 역사를 대변하듯 교정에는 수령 300-400년 보호수가 여럿 있다. 그런데 운동장 서편 담장 아래에 좀 특이한 물건이 하나 눈에 띈다. 비석처럼 보이는 제법 큰 직사각형 석조물, 세칭 현풍초등 ‘황국신민서사비’다. 이번에는 이름도 낯선 현풍초등 ‘황국신민서사비’에 대해 알아보자.
2) 일왕에 대한 충성스런 백성의 맹세
‘황국신민서사비(皇國臣民誓詞碑)’는 글자 그대로 풀어보면 ‘일본천황 백성의 맹세를 새긴 비’다. 난데없이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런데 이상할 것 없다. 위 설명 그대로다. 단 요즘은 ‘일본천황’ 대신 ‘일왕’이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만 빼고는.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일제는 조선에 대해 내선일체·황국신민화 등 민족말살정책을 폈다. 그 일환으로 일제가 조선인들에게 암송을 강요한 맹세문이 ‘황국신민서사’다. 이 맹세문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학무국 촉탁 이각종이 문안을 작성하고, 사회교육과장 김대우가 관련 업무를 추진, 1937년 10월 2일 미나미 지로 총독이 결재함으로써 공식화됐다.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학교를 비롯한 관공서·은행 등 모든 조직의 조회나 집회 때 강제적으로 이 맹세문을 암송해야 했다. 또한 신문·잡지·라디오·영화 등의 매체를 통해서도 지속으로 맹세문에 노출됐다. 한마디로 조선인의 얼과 뿌리를 모조리 없애 철저히 일본신민으로 개조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맹세문은 아동용과 일반용 두 종류가 있었다. 내용은 일본제국의 신민임을 깨닫고, 일본제국에 충성하여 보답할 것을 다짐하며, 서로 굳게 단결하여 일본제국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황국신민서사는 중국본토·대만·동남아 등에는 강요되지 않았다.
3) 현풍초등 황국신민서사비
현재 현풍초등학교 내에 있는 황국신민서사비는 1940년에 세워졌다. 비는 직사각형으로 다듬은 돌 전면에 사각 액자틀을 만든 후, 그 안에 황국신민서사를 새겨 넣었다. 상단에 우에서 좌로 ‘황국신민의서사(皇國臣民ノ誓詞)’라 새기고, 그 아래에 우에서 좌로 세로쓰기로 한자와 가타카나를 병기해 맹세문을 새겼다. 높이 106.5㎝, 너비 70.5㎝, 두께 25㎝이며 뒤에 있는 다른 돌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다. 이 비는 2011년 11월 지역 언론에 의해 ‘현풍초등학교에서 일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 비석이 발견되었다’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그런데 ‘디지털달성문화대전’에 의하면 사실관계가 좀 다르다. 실제로는 언론보도 이전부터 이 비는 지역사회에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안내판을 세워 학생들의 교육자료로 활용했다는 것. 하지만 이후 관리소홀로 교내에 방치되었다가 언론에 의해 다시 알려졌다는 것이다. 맹세문의 내용은 이렇다.
“1. 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입니다. 2. 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 하겠습니다. 3. 우리들은 괴로움을 참고 단련해서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황기 2600년[1940년]
4) 다크 투어리즘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라는 말이 있다. 전쟁이나 학살처럼 비극적인 역사 현장이나 대규모 재난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는 여행을 말한다. 다른 말로는 ‘블랙 투어리즘’, 비탄이나 슬픔을 의미하는 ‘그리프 투어리즘’ 이라고도 한다. 대표적 명소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400만 명의 유태인이 학살당했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다. 이곳에서 관람객들은 생체실험실·고문실·가스실·처형대 등을 직접 체험해보며 역사에 대한 반성과 희생자에 대한 추모의 정을 느끼게 된다. 우리 대구에도 이에 못지않은 다크 투어리즘 명소가 한 곳 있다. 팔공산 자락에 자리한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다. 2003년 192명의 사망자를 낸 2·18대구지하철화재참사를 테마로 하는 추모 및 교육공간으로 수많은 관람객들이 다녀갔다. 필자는 국내여행안내사 자격을 갖춘 여행가이드다. 그렇다보니 전국각지 유명관광지를 많이 다닌다. 특히 작년 연말에는 매주 2-3차례 구룡포 일본인가옥거리를 다녀왔다. 이 거리가 인기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촬영장으로 알려지면서 관광핫플레이스로 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곳도 다크 투어리즘 명소 중 한 곳이다. 일제가 남긴 많은 적산가옥, 드라마 메인 화면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이 앉은 계단 좌우측 120개의 돌기둥[본래 이 기둥들의 전면에는 일제 때 구룡포 개발에 공이 있었던 일본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후 구룡포 주민들은 일본인들의 이름에 시멘트 덧칠을 하고 전면을 후면으로 돌려 세운 후, 지금의 구룡포 충혼탑 건립에 공이 있는 구룡포 주민들의 이름을 다시 새겼다], 계단 위쪽에 있는 도가와 야스브로 송덕비[구룡포 방파제를 건립한 도가와 야스브로를 칭송하기 위해 일본에서 가져온 규화목으로 조성한 대형 송덕비. 이 역시 구룡포 주민들은 파괴하지 않고 송덕비문만 시멘트로 덧칠을 한 채 그대로 남겨 뒀다], 신사에 사용되었던 각종 석조유구 등. 하지만 거리를 가득 메운 관광객들은 이러한 것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드라마 배경인 카페 ‘카멜리아’와 ‘계단’ 앞에서만 긴 줄을 서서 사진 찍기에만 관심이 있으니….
5) 에필로그
누구는 이렇게 말한다. 일제 잔재는 모조리 청산해야 한다고. 그런데 청산 방법은 여러 가지다. 존재 자체를 완전히 없애는 방법도 있지만 그대로 두고 모두가 보고 기억하게 하는 방법도 있다. 구룡포·현풍 사람들처럼 말이다. 물론 이 경우에는 과거의 비극과 불편한 진실이라도 마주하겠다는 용기가 필요하다. 베트남에는 지금도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진 ‘따이한[한국] 증오비’가 100여개 남아 있다.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에 기억하게 하리라’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