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지난주 우리는 월암동 달암재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런데 월암동에는 달암재 외에도 한 채의 고가가 더 있다. 달암재에서 남동쪽으로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직선거리로는 불과 200여 미터 거리다. 이 고가는 달암재처럼 재개발의 광풍 속에서도 잘 버티고는 있지만, 을씨년스러운 모습만큼은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이 고가의 과거역사는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월암동·월배를 넘어 대구·경북에 이르기까지 그 영예로운 이름을 떨쳤으니 말이다. 이번에는 이 고가에 대한 이야기다. 고가의 이름은 보화원(補化院)이다.
2) 풍속교화에 보탬이 되리라
유교에서는 교화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가르치고 이끌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의미다. 유교는 여타 종교와는 달리 저승이라는 개념이 없다. 대부분 종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천당·지옥 같은 저승으로 가든지, 아니면 살아 있을 때의 업보에 따라 사람 또는 동물 등으로 환생한다고 한다. 하지만 저승개념이 없는 유교에서는 죽은 조상도 산사람과 함께 이승에 존재한다고 본다. 조상신을 모신 집안의 사당이 그렇고 명절제사·기제사가 그렇다. 죽은 조상이 저승이 아닌 이승의 후손에 의지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유교에서는 천당·지옥 같은 저승개념이 없다보니, 살아 있을 때 바르게 잘 살자는 게 유교교리의 대원칙이다. 그래서 교화가 중요한 것이다. 성현의 가르침을 먼저 깨달은 자가 뒤에 오는 자를 깨우쳐 바른 길로 가게 하는 것, 이로써 사회 풍속이 바르게 되면 유교이상국가인 ‘대동사회’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공자·맹자 이후 유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칭송받는 주자는 초학자들의 학문입문서로 『소학』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이 책은 여러 유교경전에서 내용을 발췌해 한 데 묶은 것인데,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소학서제」 말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이제 널리 수집하여 이 책을 만들어 동몽(童蒙)에게 주어 강습에 이용하게 하노니, 행여 풍화(風化)에 만분의 일이나마 보탬[補]이 있을 것이다.
위 인용문의 원문을 보면 ‘유보어풍화(有補於風化)’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풍속을 교화하는데 보탬이 있다는 뜻이다. 보화원이라는 이름이 이 표현에서 ‘補’ 자와 ‘化’ 자를 가져온 것이다. 사회풍속을 교화하는데 보탬이 되는 집, 보화원.
3) 보화원이 걸어온 길
보화원은 승당(承堂) 조용효(趙鏞孝) 선생이 나이 33세 때인 1956년에 설립한 재단법인 이름이다. 선생은 동양의 미풍양속과 윤리도덕이 서양 물질문명에 의해 무너져가는 당시 세태에 개탄했다. 이에 우리 민족 고유의 윤리도덕을 다시 되살리는 방편으로 보화원을 설립했다. 이때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논밭 20두락과 당시로서는 거금인 현금 500만원을 설립자금으로 쾌척했다. 일개 한 개인이 이러한 목적으로 사재를 털어 설립한 단체로는 보화원이 우리나라 최초라고 한다. 이후 1957년 월암동에 대지 600평 규모의 보화원이 세워지고, 1958년부터 현재까지 매년 30여명의 대구·경북지역 효행자·열행자·선행자를 엄선하여 보화상을 시상하고 있다. 보화상은 각 읍·면·동과 시·군·구를 거처 올라온 추천자를 대상으로 보화원 심의위원회에서 최종 심사하여 수상자를 선정한다. 2019년을 기준으로 보화상은 총 62회에 걸쳐 1,807명에게 주어졌다. 또한 그간 수상자들의 행적실기를 한데 묶은 『강상록』을 1집부터 4집까지 발간했다. 월암동 보화원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전면에 넓은 뜰과 함께 솟을대문을 갖췄다. 80년대 이곳에서 행해진 보화상 시상식 사진자료를 보면 보화원 뜰은 축하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고, 보화원 바깥 역시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불과 30여 년 전의 일이다. 참고로 보화상 본상 수상자에게는 부상으로 쌀 20가마를 실물로 수여하는 전통이 있는데, 1991년부터는 운송 상의 문제 등으로 쌀이 아닌 상금을 대신 지급하고 있다. 현재 보화원은 2013년 대명동에 4층 규모의 보화회관을 건립, 56년간의 월암동 시대를 마감하고 대명동 시대를 열고 있다.
4) 승당(承堂) 조용효(趙鏞孝)
보화원 설립자인 승당 조용효[1923-1990] 선생은 함안조씨 참봉공파 400년 세거지인 월암동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앞서 달암재편에서 살펴본 월암동 삼현인 은암 조득도의 11세손이다. 9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12세 때 월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업으로 우편집배원 일을 시작했다. 18세 때 일본인이 경영하는 ‘선광유리상사’ 점원으로 취직, 광복을 전후한 시기에 ‘선광유리’를 직접 인수해 많은 돈을 벌었다. 하지만 6·25 전쟁 직후 새로운 사업에 손을 댔다가 동업자의 사기로 모든 재산을 잃고, 부산 영도다리에서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 때 선생은 ‘돈을 바르게 쓰지 않으면 돈이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을 깨닫고 보화원이라는 사회사업의 밑그림을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보화원이라는 이름은 33세의 젊은 나이에 이런 뜻을 세우고 실천하는 선생을 보고, 유학자 성순영 선생이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의식주에 있어서만큼은 지독할 정도로 검소했던 선생은 평생 점심을 먹지 않았고, 승용차가 없었으며, 술집에서도 소주와 찌개만 시켜놓고 국물만 계속 리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보화상을 비롯해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을 보면 아낌없이 금전적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선생은 “내가 번 돈은 내가 다 가져간다. 자식에게는 한 푼도 물려주지 않는다.”는 평소 지론대로 대명동에 보화회관을 짓고 전 재산을 재단법인 보화원에 기증했다.
5) 에필로그
이름은 정말 함부로 짓는 게 아닌가 보다. 보화원 설립자 조용효 선생의 이름에는 ‘孝’자가 있다. 또한 선생의 아들이자 현 보화원 이사장인 조광제(趙光濟)씨의 이름에는 널리 구제한다는 의미의 ‘濟’자가 있다. 그러고 보니 월암동 보화원 기와 수막새·암막새에도 하나 같이 ‘孝’자가 새겨져 있다. 바라건대 보화원을 중심으로 한 선생의 ‘유보풍화’ 정신이 앞으로도 계속 잘 이어졌으면 좋겠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