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02. 월암동 세 입향조를 기리다, 달암재
  • 푸른신문
  • 등록 2020-01-29 00:00:00
기사수정

1) 프롤로그


대구시 달서구 월배는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성주와 대구에 속하기를 반복한 지역이다. 조선시대 월배지역 행정구역은 조암방과 월배방 두 곳이었다. 지금의 지하철1호선을 기준으로 북서쪽에 월성동을 중심으로 하는 조암방, 남동쪽에 상인동을 중심으로 하는 월배방이 있었다. 조선중기, 조암방에 은거 선비 3인이 있었다. 구전에는 세 선비가 의기투합해 지은 집도 한 채 있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세 선비는 죽고, 집도 사라졌다. 하지만 세 선비의 후손들에 의해 그들은 다시 세상의 빛을 보았고, 집도 다시 지어졌다. 그 집이 지금의 월암동에 있는 달암재(達巖齋)요, 세 선비의 행적을 기록한 비가 달암재 뜰에 있는 삼현유허비다.


2) 달배·월배·월촌·월암·월성·조암·영암


혹시 월배 지명유래를 아시는지? 2006년 발간된 『월배향토지』를 참고해보면 대략 이렇다.


○ 높은 산 뒤편이라는 의미. ‘달’은 높다는 뜻의 옛말이고, ‘배’는 높은 산[앞산]의 뒤편이라는 뜻이다. ‘달배’를 한자로 ‘월배(月背)’라 한 것 같다.
○ 달빛이 골짜기에 비친다는 의미의 ‘달비골’·‘달배골’을 한자로 ‘월배’라 한 것 같다.
○ 과거 월암동 서북쪽에 큰 바위[고인돌]가 6개 있었다. 위쪽 바위를 ‘윗선달배이’, 아래쪽 바위를 ‘아래선달배이’라 불렀다. 고어에서는 돌을 ‘달’이라고도 했으니 ‘달배이’와 ‘돌배이’는 서로 의미가 통한다. 돌이 많다는 뜻의 ‘달배’를 한자로 ‘월배’라 한 것 같다. 


위 내용을 요약해보면 ‘높은 산 뒤편’, ‘달빛이 비치는 골짜기’, ‘선돌이 있다’는 의미의 우리말 ‘달배’를 한자로 ‘월배’라 표기했다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월배에는 예전에 조암이라는 지역이 있었다. 과거 조선시대에는 조암방에 속했고, 근대에 와서는 대구부 조암면에 속했다. 조암은 1957년 대구시로 편입되면서 지명이 월암으로 바뀌었다. 이는 월배와 조암에서 각각 한 자씩을 딴 것이다. 이런 까닭에 지금도 지역에서는 월암을 조암이라 칭하는 예가 많다. 조암이라는 명칭은 마을 가운데 있었던 4개의 큰 바위에서 유래됐다. 바위의 모양이 마치 볏단을 쌓아 놓은 것 같다고 해서 조암(租巖), 혹은 바위 위에서 낚시를 했다하여 조암(釣巖)이라 했다는 것이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 어느 때인가 이 지역에 영암현[靈巖縣·신령한 바위가 있는 고을]이 있었다는 흥미로운 사실도 확인됐다. 이처럼 ‘조암·월암·영암’ 세 지명에는 바위가 등장한다. 최근 달서구 진천동·월성동·월암동 일대가 고인돌과 선돌을 테마로 하는 선사유적공원으로 개발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3) 월암 입향조 이언상·조득도·최성희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인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 난을 피해 이곳 월암[조암·영암]에 터를 잡은 세 선비가 있었다. 성주이씨 참봉 이언상(李彦祥·1535-1602), 함안조씨 임천군수 조득도(趙得道·1549-1610), 경주최씨 참봉 최성희(崔聖禧). 도은(桃隱) 이언상은 문경공 이직의 6세손으로 1555년에 진사에 올랐으며, 1570년에 통훈대부로 강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처사로 생을 마쳤다. 은암(隱巖) 조득도는 정절공 조려의 5세손으로 중직대부로 임천군수를 지냈다. 상여(嘗與) 최성희는 판서공 최진의 현손으로 참봉을 지냈으며 효자로 이름이 났다. 이 지역에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과 기록에 의하면 세 선비는 각자 임진란을 피해 월암에 정착했으며, 지역민 교화와 함께 의병활동에도 가담했다고 한다. 이후 월암에 세거한 세 성씨 후손들은 월암 입향조인 이들 세 선조를 높혀 ‘삼현(三賢)’이라 칭송했다.  

   

4) 월암동의 랜드마크, 달암재


‘달성 서쪽 영암촌에 예로부터 삼모사가 있었다. 이는 참봉 최성희·은암 조득도·도은 이은상의 제사를 받드는 곳이다…’ 


위는 삼현의 유래를 기록한 ‘삼현유허비’의 첫 문장이다. 정확한 때는 알 수 없지만 옛날부터 월암동에 삼현을 제사하고 기리는 삼모사(三慕祠)라는 사당이 있었다는 내용이다. 삼모사는 삼현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중국 오강에 있는 삼고사(三高祠)라는 사당 이름에 기원한 것. 세월이 흘러 어느 때인가 삼모사는 퇴락하고 이후 삼모사를 대신한 건물이 세워졌다. 바로 달암재(達巖齋)다. 1830년(순조 30)에 세워진 달암재는 삼현을 기리는 재실기능에다 후진양성을 위한 강학기능까지 더한 건물이다. 1851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건, 1880년에 중수했으나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다시 퇴락의 길을 걸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삼현의 후예들은 ‘삼모회’를 결성, 담장과 삼현유허비각을 세우는 등 삼현에 대한 제사를 계속 이어갔다. 이후 건물이 또 다시 퇴락하자 2003년 대규모 중창을 거처 지금의 달암재가 건립됐다. 솟을삼문을 갖춘 달암재는 정면 5칸, 측면 2.5칸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갖춘 ‘ㄷ’형 건물이다. 가운데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남쪽으로 돌출된 방이 있다. 동쪽 방은 삼현을 사모한다는 의미의 삼모실(三慕室), 서쪽 방은 모여 재계한다는 뜻의 취숙당(聚宿堂)이다. 한편 뜰 한쪽에는 삼현유허비를 모신 삼모각이란 비각이 하나 있다. 1939년 기묘년에 세워진 이 비에는 월암동 세 성씨 입향조인 삼현과 그 추모 내력이 새겨져 있다. 글은 단운 민병승이 짓고 글씨는 이언상의 11세손인 이종식이 썼다. 내부에는 삼모각기와 삼모각중건기문이 걸려 있다.   
    
5) 프롤로그


현재 달암재 주변은 재개발계획으로 슬럼가가 되어있다. 옛 마을의 흔적이라곤 달암재가 유일하다. 이런 와중에서도 달암재는 담장을 보수하는 등 관리가 잘 되고 있다. 재개발이 되더라고 달암재만은 지키겠다는 의미인 것 같다. 우리는 과거 도시화 과정에서 개발논리에 떠밀려 마을이 통째로 사라진 예를 수없이 봐왔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에는 마을 정체성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는 남겨두거나, 아니면 재창조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달암재가 사라지면 400년 내력의 월암동 역사도 함께 사라진다. 아무쪼록 삼모회의 현명한 판단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래서당 달암재여 영원하라!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0
푸른방송_사이드배너
영남연합포커스_사이드배너
구병원
W병원
인기글더보기
최신글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
-
하루 동안 이 창을 다시 열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