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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00. 신기한 얼음창고, 현풍 석빙고
  • 푸른신문
  • 등록 2020-01-0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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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이번 겨울은 유난히 날씨가 포근하다. 2020년 새해가 밝았는데도 아직까지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요즘의 우리로서는 따뜻한 겨울이 좋다. 하지만 과거 고려·조선 같은 왕조국가시대라면 지금과 같은 따뜻한 겨울날씨는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석)빙고를 사용하던 그 시절에는 음력 12월이 되면 얼어붙은 강얼음을 채빙해야했다. 그래야 얼음을 (석)빙고에 저장해두었다가 다음해 가을까지 사용할 수 있었기에. 그런데 날씨가 따뜻해 얼음이 얼지 않으면 채빙을 할 수 없다. 그럴 경우 조정에서 3차례에 걸쳐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추위를 기원한다하여 사한제(司寒祭) 또는 기한제(祈寒祭)라 한다. 사한제는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 눈을 기원하는 기설제, 비가 개기를 기원하는 기청제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 기우제·기설제·기청제가 한 해 농사와 직결된 백성들을 위한 기원제라면, 사한제는 오로지 여름에 사용할 얼음을 얻기 위한 왕실과 고급관리들만을 위한 기원제였기 때문이다. 우리고장에도 조선시대 얼음창고인 현풍 석빙고(보물 제673호)가 있다.      
     
2) 석빙고 유래


빙고는 얼음창고인데 돌로 만든 것은 석빙고, 나무로 만든 것은 목빙고라 한다. 우리나라 (석)빙고의 유래는 『삼국사기』 신라 지증왕 6년(505)에 빙고를 관리하는 빙고전이라는 담당부서를 두었다는 기록과 『신당서』에 ‘신라인들은 화식(火食)을 하였으며 겨울에는 부뚜막을 만들고 여름에는 음식을 얼음 위에 올려 놓는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시대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5품관인 제조를 책임자로 하는 빙고라는 직제를 두어 조선말 고종 때까지 장빙제도가 지속되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경주·안동·창령·청도·현풍·영산·해주석빙고(북한)는 모두 조선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신라·고려시대의 것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3) 석빙고에 숨어 있는 과학원리


현재 한반도에 남아 있는 7개 석빙고의 외형을 보면 하나 같이 고분 형상을 하고 있다. 또 반지하구조인 장방형 빙실의 규모도 대략 길이 10m, 폭 5m, 높이 3m 정도로 비슷하다. 그런데 돌로 빙실을 만들고 그 위에다 흙을 덮고 잔디를 입힌 이 단순한 토석구조물이 어떻게 해서 냉동창고 기능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과학원리가 숨어 있다. 첫째는 석빙고 전체를 덮고 있는 두께 약 2-3m에 이르는 흙과 잔디다. 강회처리를 한 흙벽은 강력한 단열제·방수제 기능을 하고, 잔디는 뜨거운 햇빛을 산란시키는 기능을 했다. 둘째는 무지개 아치형으로 축조된 빙실 내부구조와 빙실 천장에 설치된 2-3개의 환기구다. 이는 공기순환을 원활하게 해 위로 올라간 더운 공기는 밖으로 빼내고 찬 공기는 빙실 내에 머물게 했다. 참고로 ‘환기구 변화에 따른 경주석빙고의 전산 유체해석 연구’(정승훈, 2015, 명지대 석사논문)에 의하면 경주석빙고는 여름철에 ‘3개의 환기구를 모두 닫았을 때’와 ‘1개를 열었을 때’ 얼음의 용해률을 시뮬레이션해보니 환기구를 열었을 때 얼음이 덜 녹는다는 연구결과를 얻었다. 셋째는 얼음 위에다 볏짚·왕겨·톱밥 같은 것을 덮어 2중으로 단열처리를 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여름철 빙실 내부의 온도가 15도까지 올라가도 얼음표면은 0도씨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외에도 빙실바닥면을 한쪽으로 기울게 하여 용해수가 잘 배수되도록 한 점. 입구에 돌출형 날개벽을 두어 찬바람이 벽에 부딪혀 소용돌이치며 빙실내부로 빠르게 빨려 들어가게 한 점 등도 그렇다. 특히 날개벽은 얼음저장에 앞서 겨울 내내 빙실내부를 냉각시키는 과정에서 위력을 발휘했다. 겨울철 보통 지하실의 온도가 15도 안팎인데 반해 석빙고는 0.5-2도 정도를 유지하는 것도 이 날개벽 때문이다.  
   
4) 현풍 석빙고


현풍석빙고는 현풍읍 상리 읍동산 정상 원호루 남쪽 벼랑아래 현풍천변에 있다. 입구를 겨울철에 찬바람이 불어오는 북서쪽으로 두었고 채빙에 편리한 현풍천변에 있는 것도 다른 석빙고들과 비슷하다. 외관은 고분처럼 둥근 봉분의 형태를 갖췄으며 빙실을 덮은 흙의 두께는 약 2m다. 상부에 2개의 환기구를 설치하고 빗물과 햇빛이 들지 않게 덮개를 설치했다. 내부 빙실은 길이 11.4m, 폭 4.32m, 높이 2.6m의 장방형 구조다. 빙실 입구와 빙실 바닥의 높이차는 60cm로 1.7m인 경주석빙고에 비해 높이차가 작다. 벽과 천장을 구성하는 석재는 모두 화강암이며, 바닥은 흙과 잡석으로 마무리 했다. 입구 크기는 너비 0.8m, 높이 1.3m로 남한에 현존하는 6개의 석빙고 중 청도석빙고에 이어 두 번째로 작은 규모다. 현풍석빙고는 지난 1982년 석빙고 주변 보수작업 때 ‘현풍석빙고건성비’가 발견되면서 ‘기원후2경술11월’이란 정확한 축조연도가 확인됐다. 이를 서기로 환산하면 지금으로부터 290년 전인 1730년(영조 6)이다. 건성비에는 당시 현감인 이우인, 도감 곽재완, 감관 곽천승, 색리 이동영, 승려 호왕, 사령 김만천, 호장 김성달, 나규무 등 석빙고 축조에 관련한 인물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1982년·1994년·2003년 보수가 있었고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현황진단조사를 실시한 바가 있다.


5) 에필로그


서울에는 동빙고동과 서빙고동이 있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동빙고와 서빙고에서 유래된 동명이다. 현재 두 빙고는 남아 있지 않는데 이는 돌이 아닌 나무로 만든 목빙고였기 때문이다. 서울의 빙고는 물어보나마나 왕실과 고관대작들을 위한 빙고였을 것이다. 하지만 경주·안동·창령·청도·현풍·영산·해주석빙고는 누구를 위한 빙고였을까? 수년전부터 석빙고에 얼음을 채워 넣는 장빙제행사를 개최하고 있는 안동석빙고의 경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안동석빙고 장빙제는 조선시대 임금님 진상품인 안동은어를 저장했던 안동석빙고에 어떻게 낙동강 얼음이 채취되어 운반되고 저장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중략) 옛 방식 그대로 재연하는 행사다’ 결국 지방의 석빙고도 임금을 위한 냉동창고였나 보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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