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렸더니/오는 이 가는 이 흙이라 하는구나/두어라 알 이 있으니/ 흙인 듯이 있거라’ 필자가 즐겨 암송하는 공재 윤두서의 시조다. 필자처럼 향토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하나 있다. 흙이 묻어 길가에 버려진 옥(?)을 알아보는 눈이 남다르다는 것. 남들은 무심코 지나치는 장소지만 향토사를 공부하는 이들의 눈에는 가는 곳마다 시선과 발걸음 붙잡는 옥들이 있으니 말이다. 이번에는 화원동산 사문진 나루 입구 오른쪽 언덕 비탈에 흙이 묻은 채 버려져 있는 옥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이 옥의 이름은 낙동정사(洛東精舍)다.
2) 조선말 대구 큰선비 임재선생
거유(巨儒)라는 표현이 있다. 이름난 유학자 또는 큰선비를 뜻하는 말이다. 조선이 막을 내린 19c말, 우리 대구 유학자 중에 ‘임재(臨齋)선생’이라 불렸던 큰선비가 있었다. 선생의 이름은 서찬규(徐贊奎·1825-1905), 자는 경양(景襄), 호는 임재, 본관은 달성이다. 달성서씨 21세인 선생은 고려·조선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구역사의 주류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대구최대명문가의 후손이었다. 직계로만 따져 봐도 1세 서진·2세 서기준·3세 서영 3대가 달성군에 봉해졌고, 4세 서균형은 문과에 급제해 대제학을 지냈으며, 5세 서침은 조선 세종 때 세거지 달성을 국가에 양보하는 대신 대구부민의 모곡이자를 탕감 받았으며, 12세 서사진은 임란의병장으로 이름이 났다. 선생의 이력을 한번 요약해보자.
지금의 대구 계산동에서 태어난 선생은 22세[1846]의 나이로 생원시에 급제해 성균관에서 수학했다. 26세[1850] 때 당시 기호학파의 거두였던 매산 홍직필의 문하에 들어 수제자로 인정을 받고, 스승의 문집 간행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 38세[1862] 때 고향인 계산동에 서실인 수동재(守東齋)를 지었다. 관찰사 서헌순[40세]·이근필[56세]·윤자승[58세]·암행어사 이도재[59세] 등으로부터 인재로 천거를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의금부 도사[64세]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67세·68세 때는 관찰사 이헌영이 마련한 향음주례에 주빈으로 참여했다. 76세[1900] 때 조정으로부터 강학공간으로 지금의 화원동산 상화대의 한 구역을 하사받아 이듬해 77세[1901] 때 낙동정사를 지어 만년 강학소로 삼았다. 81세를 일기로 수동재에서 졸했다.
평생을 유학자로 살았던 그는 『임재선생문집』·『임재일기』·『취정일록』·『반계수록정요』 등 많은 저술과 글을 남겼다. 참고로 달성서씨 낙동정사에서 소장해오다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임재선생 관련 목판·고서·고문서·현판 등은 모두 4,774점에 이른다.
3) 향음주례(鄕飮酒禮) 주빈(主賓)
임재선생이 조선말 대구의 큰선비였음은 67세·68세 두 번에 걸쳐 향음주례에 주빈으로 초청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향음주례는 고을수령이 주관하여 고을 내 귀인과 선비들을 모시고 정해진 엄격한 예법에 따라 실시하는 주례(酒禮)다. 지금의 우리에 비유하면 대구시장이 지역 내 오피니언그룹의 장들을 초청하여 연찬회를 여는 것과 비슷하다. 주최·주관은 대구시, 진행과 참여는 대구유림이 하는 식이다. 향음주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고을수령이 아닌 ‘빈[손님]’으로 초대된 인물이다. 빈은 모두 4인인데 이중 주빈이 되는 1인이 향음주례 최고의 ‘VVIP’다. 그런 만큼 주빈은 아무나 될 수가 없다. 삼달존이라 하여 ‘벼슬·나이·덕’이 지역사회 최고라는 인정을 받는 자만이 선정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리에 그것도 경상도관찰사[경상남북도 통합 도지사]가 주관하는 향음주례에 연거푸 두 번이나 주빈으로 초청되었다는 사실만 봐도 임재선생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늠해볼 수 있다. 향음주례에서는 술만 마시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절차를 지키면서 술을 마시고, 음악을 연주하고, 시를 읊고, 글과 향약을 낭독한다. 고을민들에게 효제목린(孝悌睦隣)을 권장코자하는 향음주례는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중국 주나라 때부터 시작된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닌 예법이다.
4) 강학소이자 추모소 낙동정사
1901년 화원동산 상화대 아래에 건립된 낙동정사는 임재선생 강학소다. 이 터는 본래 국가 땅이었는데 낙동정사를 건립코자하는 대구유림의 청원이 받아들여져 조정에서 상화대 한 구역을 허락함으로써 성사된 것이다. 정사를 짓는데 들어간 돈은 달성서씨문중을 비롯한 지역 문중·사림 등에서 부조를 했다. 경도재 우성규가 지은 「낙동정사기」를 보면 낙동이란 이름은 낙(동)강에서 나온 것이며, 낙동정사가 퇴계의 도산서원을 비롯한 역동서원·도동서원·사양정사·동락서원에까지 그 연원이 이어져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서쪽 방을 임연당(臨淵堂)으로 한 것은 정사 남쪽에 연암이 있기 때문이요, 동쪽 방을 방화정(訪花亭)이라 한 것은 북쪽에 상화대가 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선생의 제자인 미강 박승동의 작품으로 알려진 2점의 상화대[1899·한국국학진흥원소장] 그림을 보면 당시의 상화대와 낙강·연암 그리고 상화대 아래 지금의 낙동정사 자리에 두 채의 초가가 있는 모습 등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선생은 1901년부터 1905년까지 5년 간 이곳 낙동정사에서 강학을 했는데, 당시 낙동정사의 위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있다. 낙동정사를 중심으로 하는 제자들의 계모임인 ‘임연당유계안’과 ‘임연당학계안’이다. 이 둘은 모두 선생 생전에 작성된 것으로 ‘유계안’에는 661명, ‘학계안’에는 400여 명의 명단이 등재되어 있다. 이외에도 선생 사후 후손들과 제자들이 낙동정사에서 강학한 내용을 기록한 강록 등이 많이 남아 있다.
5) 에필로그
화원동산과 사문진나루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구 관광 핫플레이스다. 100대 피아노 콘서트가 개최되고, 유람선이 다니고, 1년 365일 사문진주막촌은 성업 중이다. 하지만 아무도 화원동산 주차장 동편에 자리한 낙동정사에는 관심이 없다. 세상이 변한 만큼 세상 탓을 하고 싶지는 않다. ‘낙동정사여! 언젠가는 알 이 있으니 흙인 듯이 조금만 더 있거라!’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