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북쪽으로 대니산을 머리에 이고. 서쪽으로 낙동강을 끼고 있는 들판마을 달성군 구지면 화산리. 수년 전까지만 해도 화산리는 들판 사이 몇 몇 동산을 중심으로 취락이 형성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그런데 2013년부터 이 지역에 대규모 대구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기 시작, 2019년 현재 단지조성사업이 완료되고 기업체들의 입주가 진행 중이다. 이 대구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화산리는 초토화됐다. 마을과 들판은 물론이요, 동산조차도 남김없이 다 밀어버렸다. 그 탓에 외지인은 물론 구지주민들조차도 지금의 화산리를 보면 어디가 어딘지 혼란스러워 할 정도다. 그런데 그 많던 화산리의 마을·들판·동산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 두 개가 있다. 바로 화산마을 뒷산인 화산(花山)과 화산 남쪽 기슭에 다시 세워진 화산서원(花山書院)이다.
2) 화산촌과 규헌 곽승화
‘대니산 한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내려 터를 많이 만들어냈다. 그중 낙동강 동쪽에 산이 하나 있으니 이름하여 화산이다. 화산은 규헌 곽승화 선조 이래로 곽씨문중 선영이다. 화산의 동쪽에 마을이 있으니 화산촌(花山村)이다.’ 이는 『화산재중건기』 첫머리에 나오는 내용이다. 화산마을은 아름다운 꽃이 많다하여 화산이란 이름을 얻는 화산 남동쪽에 자리한 마을이었다. 하지만 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화산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화산만은 살아남았다. 삼라만상 중 까닭 없이 존재하는 사물은 없는 법. 화산에는 오랜 세월 이곳에 세거해온 현풍곽씨문중선영이 있다. 특히 현풍곽씨 규헌공파 파시조인 곽승화(郭承華)의 묘소가 화산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 만큼 화산은 마을의 주산이자 화산마을 현풍곽씨들의 정신적 귀의처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제 아무리 국가주도의 산업단지가 들어선다한들 화산마을 현풍곽씨들은 수백 년 내력의 마을은 포기할지언정 선조의 묘소가 있는 화산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청백리공 곽안방의 3자 중 2자인 곽승화는 자가 자실, 호는 규헌( )으로 1477년(성종 8) 진사에 급제, 한훤당 김굉필과 함께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인물로 세상 사람들은 이 둘을 가리켜 ‘김곽양수재’라 칭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회가 일어났을 때, 그는 미리 화를 예측하고 집에 보관 중이던 책과 편지 등을 불태워버린 어머니 김해송씨의 지략으로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 후로 그는 고향에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사후 도동서원 별사[별도로 세운 사당]에 제향되었으나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 때 이 별사는 훼철됐다.
3) 화산재에서 화산서원으로
화산서원은 1990년에 건립되었으니 역사가 오랜 서원은 아니다. 하지만 화산서원의 전신인 화산재(花山齋)로부터 역사를 따진다면 만만찮다. 화산마을에는 정확한 내력은 알 수 없지만 오래전부터 화산 선영 남쪽에 화산재가 있었다. 그런데 1950년 6·25한국전쟁 때 대문채만 남기고 정당과 아래채가 소실됐다. 이후 규헌공파 문중에서 본래 자리에 4칸 재사를 세웠다가 1968년 5칸으로 중건함과 동시에 예전의 목재를 사용해 3칸 아래채도 다시 세웠다. 1975년에 3칸 행랑을 더하고 1982년에 또 한 번 중건이 있었으니 여기까지가 화산재의 역사다. 1990년 화산재는 사당인 경덕사와 솟을외삼문인 상지문 등을 갖추면서 비로소 화산서원으로 승격된다. 하지만 2013년 화산리 일대에 대구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자 2016년 본래의 자리에서 서쪽으로 100여m쯤 이동, 곽승화 묘소 바로 아래에 서원을 다시 중창을 했으니 지금의 화산서원이다. 화산서원은 땅콩 모양으로 생긴 화산의 오목한 허리부분 남쪽에 있다. 솟을 외삼문인 상지문(尙志門)을 들어서면 앞쪽에 정면 5칸, 측면 3.5칸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을 이고 있는 강당이 있고, 좌우에 동재 창덕재(彰德齋), 서재 유래재(?來齋)가 있다. 강당 뒤편에는 내삼문인 준례문(遵禮門)이 있고 그 안쪽에 사당 경덕사가 있다. 강당과 동·서재는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이고, 솟을삼문과 사당영역은 모두 단청을 칠했으며 담장은 흙돌담에 기와를 얹었다. 사당에는 현풍곽씨 현조 4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데 주향에는 곽승화, 배향에 곽간·곽율·곽재겸이다.
4) 곽간·곽율·곽재겸
곽간[1529-1593]은 자가 원정, 호는 죽재(竹齋)로 곽안방의 현손[고손자]이다. 낙천 배신의 문하에서 예학을 익혔으며, 1546년(명종 1)에 증광문과에 급제해 여러 내외직을 거쳤다. 임란 때 초유사 김성일의 휘하에서 활략하다 졸했으며 사후 고령 월암사에 제향됐다. 곽율[1531-1593]은 자가 태정, 호는 예곡(禮谷)이며, 곽안방의 현손이다. 남명 조식의 제자이며 사마시에 합격했다. 홍산현감·군자감판관·예천군수 등을 지냈으며 임란 때 합천에서 창의하여 초계임시군수로 맹활략을 펼쳤다. 포산오현 중 일인으로까지 일컬어졌던 그는 사후 도동서원 별사에 제향되었다가 현재는 화산서원에 모셔졌다. 곽재겸[1547-1615]은 자가 익보, 호는 괴헌(槐軒)이며 곽안방의 5세손이다. 계동 전경창과 한강 정구의 제자이며 현풍을 떠나 대구 해안에 옮겨 살았다. 임란이 발발하자 그는 해오면의 도대장에 추대되어 활략했고, 정유재란 때는 화왕산성을 지켰다. 사후 지금의 대구 동구 불로동 유호서원에 제향이 되었으나 흥선대원군 때 훼철되고 지금은 화산서원에 제향됐다.
5) 에필로그
지금의 화산서원에 모셔진 곽승화·곽간·곽율·곽재겸 4위는 공교롭게도 흥선대원군 시절 자신들이 제향된 서원 혹은 사우가 모두 훼철됐다. 이에 후손들이 모여 이들 4위를 다시 제향할 방도를 찾았으니 바로 화산서원 건립이었다. 곽간·곽율은 곽승화의 증손자요, 곽재겸은 현손자다. 따라서 곽승화의 묘소 아래에 화산서원을 건립하고 이들 4위를 제향한 것은 의미가 있다. 한편 화산서원에서 현풍 방향으로 5분 거리에 있는 솔례마을 앞 용두산 정상에는 대양정(戴陽亭)이란 누각이 하나 서 있다. 이는 김굉필과 곽승화 두 인물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누각으로 서흥김씨·현풍곽씨 두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