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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97. 현풍곽씨 시조 이하 5위를 제향한 암곡서원
  • 푸른신문
  • 등록 2019-12-1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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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쇠뿔도 당김에 빼라는 말이 있다. 지난번 낙동서원에 이어 이번에도 서원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보기로 하자. 현재 대구에 남아있는 서원 25개소 중 절반이 넘는 16개소가 우리 고장인 달서구·달성군에 있다. 이중 아직까지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하지 않는 서원은 암곡서원·화산서원·남계서원 3곳인데 이번에는 암곡서원에 대한 이야기다.   


2) 현효(玄驍)→포산(苞山)→현풍(玄豊)→현풍(玄風)


『고려사』·『동국여지승람』 등에 의하면 현풍의 옛 지명은 신라시대 때 추량화(推良火)·현효라 불리다가 고려 때 ‘포산’이 됐다. 흥미로운 것은 현풍곽씨 문중기록에 의해면 포산이란 지명이 현풍곽씨 시조에 의해 생겨난 지명이라고 한다. 현풍곽씨 시조는 고려시대 때 중국에서 고려로 온 곽경[郭鏡·1117-1179]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고려에서 공을 세움으로써 고려조정으로부터 ‘현효’지역을 봉읍으로 받는데, 이때 현효라는 지명을 ‘포산’으로 바꿔 봉읍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고향인 중국 관서지방 홍농 포기의 ‘포’ 자와 기산의 ‘산’ 자를 취한 것이라고 한다. 이후 포산은 풍요롭다는 의미의 ‘현풍(玄豊)’으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문풍이 일어난다는 의미의 ‘현풍(玄風)’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때만 해도 현풍 땅은 지금의 현풍·옥포·구지·유가·논공 일대를 모두 아우르는 큰 고을이었다. 


3) 현풍곽씨 원당 목사공파


시조 곽경은 본래 송나라 문연각 한림학사였는데 17세 때인 1133년(인종 11) 7명의 학사와 함께 고려로 들어왔다. 이후 그는 고려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공을 세움으로써 관직이 고려 최고위직인 정2품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평장사에 이르렀다. 현풍곽씨는 5세 곽기정·곽한정 대에 와서 기호파와 영남파로 분파된다. 영남파는 다시 8세를 더 내려와 3개 파로 나눠지는데 첫째 집은 현풍 원당(院塘)을 세거지로 하는 ‘목사공파’, 둘째 집은 영천 마단 ‘경재공파’, 셋째 집은 현풍 솔례 ‘청백리공파’다. 이중 목사공파가 터를 잡은 원당은 현풍·구지의 주산인 대니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본래 의령남씨들이 살았는데 현풍곽씨 17세 곽창도라는 인물이 현풍 성하리를 떠나 이곳으로 이거해옴으로써 현풍곽씨 목사공파 세거지가 됐다. 원당이라는 마을명은 못[塘] 넘어 또는 제방[塘] 옆에 있는 마을이라는 설, 도동서원[院]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라는 설 등이 있다.


4) 포산사(苞山祠)에서 암곡서원(巖谷書院)으로


암곡서원은 현풍곽씨 목사공파를 대표하는 서원이다. 암곡서원의 전신은 1960년에 창건한 포산사다. 포산사는 본래 시조 이하 5위를 제향하는 사우였다. 주향인 정의공 암곡 곽경은 현풍곽씨 시조요, 배향인 5세 정간공 곽기정은 고려에서 이부상서를, 5세 포산군 곽한정은 병부상서를, 6세 곽자의는 금오위교위를 지낸 인물이다. 13세 곽순종은 목사공파 파조로 조선 단종 때 17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해 웅천·벽동·개천·안악 등의 고을수령을 거처 안주·진주목사 등을 역임했다. 1494년(성종 25)에는 경상도관찰사 이극균에 의해 한훤당 김굉필과 함께 은일지사로 조정에 천거된 사실이 있으며, 중종 때 경연청에 천거된 사실이 충재 권벌의 『정원일기』에 실려 있다. 포산사는 2009년에 서원으로 승격됐는데 기존의 포산사 건물은 그대로 두고 뒤편에 새 건물을 지어 암곡서원이라 이름 했다. 암곡서원 솟을 외삼문인 제성문(齊盛門)을 열고 경내에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인 정일당(精一堂)이 있다. 정일당은 정면 5칸, 측면 1.5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용마루 양끝에 요즘 보기 드문 치미가 있어 찾는 이들의 눈길을 끈다. 3칸 대청을 중심으로 동쪽 방은 저녁마다 두려워하고 경계하면 큰 허물이 없다는 뜻의 석척당(夕惕堂), 서쪽 방은 종일토록 공부하고 힘쓰라는 의미로 일건당(日乾堂)이란 이름을 붙였다. 동·서재는 각각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동재는 의인재(依仁齋), 서재는 경의재(敬義齋)다. 사당은 강당 뒤편 제법 높은 곳에 별도의 담장 두른 채 자리하고 있는데 내삼문의 이름은 숙연문(肅然門)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현풍곽씨 시조 곽경을 제향하는 추모시설은 경기도 용인의 대덕사와 현풍의 암곡서원이 유일하다. 그런데 서원명으로 사용된 ‘암곡’이라는 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렇다. 암곡은 시조 곽경의 호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900년 전 인물이지만 1930년대에 도굴 출토된 지석으로 인해 정확한 인적사항이 확인됐다. 지석이란 죽은 사람의 성명·생몰·행적·무덤의 위치 등을 기록하여 무덤 앞에 묻는 돌판 또는 자기판을 말한다. 당시 발견된 지석의 내용을 우리말로 풀어보면 이렇다.


공의 이름은 경이니 고려 인종조 무오년(1138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평장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의, 호는 암곡·초수, 초명은 약노, 자는 노이인데 포산군에 봉해졌다. 본래 중국 관서 홍농 사람이었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며 기해년(1179년) 10월 15일 졸하였으니 향년 63세다. 다음해 2월 초 10일 중성 반룡산 남록에 장사했다. 아들은 헌이다.


5) 에필로그


암곡서원과 포산사 조금 못 미처 길 좌측에도 옛 건물 2채가 있다. 이는 현풍곽씨 목사공파 문중재실인 추원당과 월계정이다. 위쪽에 있는 추원당은 현풍곽씨 목사공파 파조인 곽순종과 그의 아버지인 곽함, 할아버지인 곽정부 3대를 기리는 재실이다. 1897년에 창건되어 1950년 6·25사변 때 소실되었다가 1955년 복원됐다. 대청에 용인군수를 역임한 장윤원의 기문이 걸려 있다. 아래쪽에 자리한 월계정은 현풍곽씨 27세인 곽기연과 곽기준 형제의 강학소로 1925년에 건립됐다. 월계정도 추원당과 마찬가지로 6·25 사변 때 소실되었다가 1976년에 중건됐다. 광주인 이이건의 창건기문, 군수 장윤원의 상량문, 야성인 송준필의 서문, 서흥인 김은식·인동인 장일상·행주인 기우흥의 중건기문 등이 대청에 걸려 있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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