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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96. 덕동서원 업그레이드판 낙동서원
  • 푸른신문
  • 등록 2019-12-1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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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세상이 이제야 향교·서원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본 것 같다. 금년 7월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국내 서원 9곳이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재된 것도 그렇고, 문화재청 문화재활용사업 중 하나인 향교·서원활용사업을 봐도 그렇고, 내년부터 실시될 예정인 대구광역시 교육청 주관 초등학생 인성교육프로그램 등을 봐도 그렇다. 유네스코가 한국의 서원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이유는 한국의 성리학이 수 백 년 세월동안 사라지지 않고 전승·계승될 수 있었던 이유를 서원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이번에는 이 지면을 통해 아직 소개하지 않은 달서구 상인동 단양우씨 월촌세거지에 있는 낙동서원(洛東書院)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2) 낙동서원의 모태 덕동서원


대체로 서원은 사우[사당]·재실 같은 제향시설 혹은 서당·정사 같은 강학시설에서 시작된 경우가 많다. 낙동서원의 모태라 할 수 있는 덕동서원(德洞書院)도 마찬가지다. 덕동서원은 ‘덕동사’라는 사우에서 출발했다. 덕동사는 1708년(숙종 34) 월촌 출신 임란의병장인 우배선 장군을 기리기 위해 사림에서 건립한 사우다. 덕동이라는 명칭은 옛날 이 지역이 성주 덕동리였던 것에 연유한 것. 덕동사가 건립되고 72년이 지난 1780년(정조 4), 우배선의 7대조인 양호당 우현보를 덕동사에 함께 제향하면서 덕동사를 덕동서원으로 승격시켰다. 하지만 그로부터 88년이 지난 1868년(고종 5), 덕동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된다. 그 뒤 약 100년의 세월이 흐른 1965년, 덕동서원을 모태로 하는 새로운 서원이 창건되었으니 바로 지금의 낙동서원이다. 본래 덕동서원이 있었던 자리는 낙동서원에서 남동쪽으로 약 500m정도 떨어진 곳으로 지금의 월곡정사 남동쪽 인산정사가 있는 자리다.


3) 낙동서원에 제향된 5인


상인동 월곡역사공원 내에 자리한 낙동서원은 별도의 동·서재 건물 없이 정면 10칸·측면 2칸 규모의 ‘ㄱ’자형 강당 정교당과 사당 계현사가 중심건물이다. 정교당은 대청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원장실인 처인헌, 서쪽에는 재유사실인 염수실, 염수실 남쪽에는 원생실인 지경재, 동쪽 끝과 서쪽 끝에는 누마루인 향양대와 근수루가 있는데 이 모든 것이 한 건물 안에 있다. 계현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이다. 그 외 외삼문인 진덕문, 내삼문인 숙청문, 서고인 백승각, 동쪽으로 나있는 작은 문인 통정문 등이 있다. 낙동이라는 이름은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와 함께 유학의 도통이 이곳까지 이어졌음을 의미한다. 계현사에는 모두 5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주향은 우탁, 배향은 신현·우길생·우현보·우배선이다. 주향으로 모신 우탁[禹倬·1262-1342]은 자가 천장, 호는 단암·자운, 시호는 문희인데 세칭 ‘역동 선생’이다. 17세에 향공진사[조선조 생원·진사와 유사], 29세에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갔다. 47세에 감찰규정으로 있을 때 충선왕의 불의에 목숨을 걸고 극간한 일이 있으며, 충숙왕 때는 여러 번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고려 말 우리나라에 정자의 『역전』 [주역]이 처음 들어왔을 때 아무도 『역전』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오직 우탁만이 『역전』을 이해하고 강독했으니 후일 조선 태조에 의해 ‘동방이학지조’로 칭송받았다. 신현은 자가 경신, 호는 불훤재·운월재, 시호는 문정으로 평산신씨 영해파조다. 우탁의 수제자로 충숙왕 때 문과에 장원을 했으며, 충숙왕이 모함을 받아 원나라에 소환되었을 때는 왕을 수행하고 변호했다. 당시 고려와 원 양국 왕의 스승을 지냈던 운곡 원천석이 신현의 수제자다. 우길생은 우탁의 아들로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했고, 공민왕 때는 홍건적 난에 공훈을 세워 단성익대보조공신2등에 오른 인물이다. 우현보는 자가 원공, 호는 양호당·독락당, 시호는 충정이다. 우탁의 손자로 공민왕 때 문과급제, 우왕 때는 우시중에 제수되고 단양부원군에 봉군되었다. 고려 말 포은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피살되었을 때 아무도 시신 수습에 나서지 못했다. 그때 오직 우현보만이 나서서 천마산에 있는 승려를 시켜 정몽주의 시신을 거두어 안장했다는 기록이 전하며, 두문동 72현으로 개성 숭양서원에 제향되었다. 우배선[禹拜善·1569-1622]은 자가 사성, 호는 월곡으로 임난 때 의병장으로 큰 공훈을 세운 인물이다. 임난 당시 그는 24세의 백면서생[글만 읽어 세상일에 어두운 사람]의 신분으로 일어나 화원현 의병장으로 맹활략을 했다. 이때의 공으로 선무원종공신1등에 올랐으며, 이후 합천·금산·낙안군수를 역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학문은 역동 우탁을 닮았고, 충절은 양호당 우현보를 본받았다고 칭송했다.


4) 우탁→우길생→우현보→우홍명→우흥륜→우전


단양우씨는 고려조에서 향공진사를 지낸 우현을 시조로 하는 성씨로 세칭 ‘고려 8대 성씨’ 중 하나다. 우탁의 증손자인 우홍명이 월촌에 세거하는 단양우씨 판서공파 파조이며, 우전이 월촌 입향조다. 여말선초 단양우씨는 불사이군의 충절을 앞세워 조선이 아닌 고려를 택함으로써 많은 고초를 겪었다. 대표적인 예가 조선 초 정도전의 화(禍)로 우홍명 등 일족이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 이때 화를 피해 우홍명의 아들 우흥륜은 성주에 은거하였고, 그의 아들 우전은 다시 대구 월촌에 은거하였으니 이것이 단양우씨 월촌 입향 내력이다. 월촌 우씨문중에서는 충신·효자·열녀·학자가 많이 나왔는데 이를 두고 세상에서는 월촌에 터를 정할 때 비슬산 삼필봉을 안산으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설과 입향조를 포함한 선대의 음덕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 등이 전한다.


5) 에필로그


아파트 빌딩숲으로 둘러싸인 낙동서원. 낙동서원이 자리한 월곡역사공원 일대는 600년 내력의 단양우씨 월촌문중의 전통문화유산들이 많이 산재해 있다. 낙동서원을 비롯해 월곡역사박물관·열락당·장지산 송림·죽림·우배선 나무·정략장군 우전 유적비·월곡 우선생 창의유적비·의마비(義馬碑)·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성균관부관장 우종식 공적비·민족정기탑·겹벚꽃길 등이 있으며, 인근에는 월곡정사·추모재·경인재·인산정사 등이 있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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