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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95. 성주도씨 서재문중 열부들, 정열각
  • 푸른신문
  • 등록 2019-12-0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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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지난번에 이어 이번 이야기도 조선시대 우리고장을 살다간 여인들 관련한 유적 이야기다. 그것도 자신의 삶을 포기한 채 오직 남편과 시댁과 친정 문중을 위한 삶을 살다간 열부들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매우 불편한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효(孝)와 열(烈)은 조선시대에 이 땅을 살다간 여인들에게 요구되었던 지상최고의 덕목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 만큼 이번 기회에 조선시대 여인들에게 요구되었던 효열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기로 하자. 이번에는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성주도씨 세거지에 있는 성주도씨문중 3열부를 기리는 정열각(旌烈閣)이다.


2) 도필상의 처 아주신씨


지금으로부터 243년 전인 1776년(영조 52), 서재 도촌에서 한 여인이 자결을 했다. 그녀는 도여유의 6세손인 도필상의 처 아주신씨였다. 아주신씨는 젊어서 일찍 남편이 죽자 곧장 남편을 따라 자결을 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던 관계로 장사와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었다. 이때 평소 그녀의 어질고 후덕한 대우를 잊지 않고 있던 노비 설만(雪滿)이 어렵게 비용을 마련해 주인의 장사를 지내고 제사를 받들었다. 이 미담을 전해들은 어사 심기태가 조정에 정려를 청원, 1783년(정조 7) 정려가 내렸다. 그리고 주인을 잘 섬긴 충노[忠奴·충성스런 노비] 설만에 대해서는 신분을 노비에서 양인으로 면천해 주었다. 과거 서재마을 동쪽 입구 한 바위에 열부 아주신씨를 기리는 암각비가 있었다. 그런데 암각비가 1990년 도로확장으로 사라지게 되자 그 아래에 별도의 정절비를 세우고 정려는 지금의 정열각으로 옮겨 합쳤다. 참고로 도필상의 6대조인 도여유는 성주도씨 서재 입향조인 도흠조의 손자이자 성주도씨 대종손인 양직당 도성유의 사촌 동생이다. 도성유와 도여유는 조선중기 대구를 대표하는 선비로 이름이 났다. 도여유는 호를 ‘호미질 하는 집’이란 뜻에서 서재(鋤齋)라 했는데, 지금의 ‘서재’라는 지명이 바로 그의 호에서 유래됐다.  


3) 도필해의 처 월성최씨


지금으로부터 223년 전인 1796년(정조 20) 음력 3월 29일. 서재마을에서 또 한 명의 여인이 자결을 했다. 서재에 살던 양직당 도성유의 6세손 도필해의 처 월성최씨가 자결을 한 것이다. 그녀는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남편을 여의었다. 청상과부가 된 월성최씨는 곧장 남편의 뒤를 따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임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뒤 월성최씨는 유복자를 출산해 후사를 이은 후 약을 먹고 자결했다. 젖먹이 자식을 남겨두고 남편 뒤를 따른 월성최씨의 열부행이 세상에 알려지자 1803년(순조 3) 열부 정려와 함께 복호(復戶)의 명이 있었다. 복호는 충신·효자·열녀 등에게 나라의 조세·부역 따위를 면제해주는 특별한 혜택을 말한다.   

 

4) 도진극의 처 순천이씨


지금으로부터 185년 전인 1834년(순조 34), 또 한 명의 여인이 자결을 했다. 도성유의 8세손 도진극의 처 순천이씨가 자결을 한 것이다. 도진극과 순천이씨는 1809년생으로 동갑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순천이씨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했다. 더욱이 후사도 잇지 못한 상태였기에 남편의 장사를 치르는 그녀의 비통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의 장례를 예법에 맞게 잘 치른 뒤, 시댁과 친정 부모님께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어 자결했다. 이러한 순천이씨의 가슴 아픈 순절 사실이 세상 사람들의 입을 통해 조정에까지 알려져 1842년(헌종 8) 효열의 정려가 내렸다.


5) 다칸형 목조정려각 정열각


성주도씨문중 3열부를 기리는 정열각은 성주도씨 문중서원인 용호서원에서 동쪽으로 난 길 입구에 있다. 정열각은 일반적인 정려각과는 그 양식이 좀 다르다. 길 한쪽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별도의 담장을 두르지 않은 채 정려각만 있는 양식다. 정려각의 형태도 한 칸짜리 정려각이 아닌 3칸짜리 다칸형 목조정려각이다. 정열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사방은 모두 홍살벽으로 되어 있고 단청이 칠해져 있다. 정면에서 마주 보았을 때 좌측에서부터 아주신씨, 월성최씨, 순천이씨 순이다. 내부에는 각 칸마다 정려편액이 걸려 있으며 오야 장병규가 지은 「열려각이건기」도 걸려 있다. 이건기에 의하면 본래 3열부 정려각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했었는데, 세월의 흐름으로 손상이 되자 1987년 지금처럼 하나의 정려각으로 합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려각 관련해 종종 받는 질문이 있다. “선생님, 정려각 안에는 왜 아무것도 없어요?” 질문처럼 대부분의 정려각은 내부에 아무 것도 없다. 이곳 정열각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보면 내부 뒷벽에 좌우로 길쭉한 형태의 정려편액이 걸려 있다. 아마도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정려각하면 여느 비각처럼 내부에 비석 같은 물건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정려각 내부에는 정려편액이라 칭하는 나무판자 하나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본래 정려는 나무로 만든 허문(虛門) 형태의 홍살문을 말하는 것으로 정표자의 집 대문 앞에 세운 것을 ‘정문’, 동네 입구에 세운 것을 ‘정려’라 한다. 그런데 나무로 만든 정려는 노상에서 몇 백 년 세월을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정려가 비바람에 상하고 부서지면 정려를 다시 편액[현판]의 형태로 바꾼 뒤, 정려각을 짓고 그 내부에다 봉안한 것이 바로 정려각이다. 따라서 정려각 내부에는 정려를 대신한 정려편액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정려비·정려기·시판 등이 있는 예도 많다.


6) 에필로그


성주도씨 용호문중 유물 제2호로 지정되어 있는 정열각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693번지에 있다. 성주도씨 대종파 500년 세거지인 이곳 서재마을에는 정열각 외에도 용호서원과 치경당 등의 문화유산이 있다. 용호서원은 성주도씨 현조인 도성유, 도여유, 도신수 3위를 제향하는 서원이며, 치경당은 성주도씨 시조인 도순과 3세조인 도유도, 도유덕을 기리는 재실이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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