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백랑 이정환의 서각(書刻), 나무에 혼(魂)을 불어넣는 예술
  • 강효금
  • 등록 2025-01-28 11:17:53
  • 수정 2025-01-28 11:24:14
기사수정

작업할 때면 시간의 흐름이 멈추는 것 같다고 하는 백랑 이정환 [사진=이현아 기자]

대구 동구 용계동, 한적한 곳에 자리한 백랑 이정환(76)의 작업실. 약속 시간 맞춰 도착한 그곳엔 갓 내린 커피 향기가 가득했다.


그가 작업하는 방식은 독특하다. 한 손에 든 칼이 유일한 작업 도구다. 일반적으로 보는 망치와 조각도를 양손에 나눠 들고 하는 것과 달라 의아했다. 서각(書刻)은 글(書), 새길(刻) 자로 글이나 그림을 나무나 기타 재료에 새김질하는 것을 말한다.


“저는 혼자 각(刻)하는 법을 익혔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몸에 맞는 칼날을 찾아 그걸 다듬어 문방구에서 파는 칼집에 끼워 사용합니다. 칼날은 뛰어난 강도(强度)로 유명한 스웨덴과 일본 제품을 철물점에서 사서 직접 제작합니다.”


칼 하나만 가지고 하는 작업은 힘든만큼 세밀한 결과물을 낳는다. [사진=이현아 기자]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 작품으로 가득한 전시실


작품이 빼곡하게 차 있는 전시실. 백랑의 손길이 닿은 작품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생생하게 다가온다.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세한도(歲寒圖)와 난(蘭), 이승만(1875~1965) 대통령과 ‘흥선대원군’으로 잘 알려진 석파(石坡) 이하응(1821~1898)의 글씨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세한도는 나이가 들수록 좋아지는 작품입니다. 흔히 이 집의 가운데 있는 이걸 ‘창문’이라고 합니다. 새김질하며 계속 몰두하다 보니, 이게 ‘사람의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북쪽, 임금님이 계신 곳을 바라다보는 ‘추사의 모습’. 그런 느낌으로 제게 와닿았습니다.”


그의 서각 작품 앞에 선 백랑의 모습 [사진=이원선 기자]
-‘상선약수(上善若水)’는 직접 쓴 겁니까?


▶노자의 도덕경 8장에 나오는 이 구절을 생활의 좌우명(座右銘)으로 삼고 있습니다. 실천하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서예는 초등학교 시절 처음 접했습니다. 당시에는 서예 시간이 있었고 붓글씨 쓰는 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을 좋아했지요.


저기 걸린 신윤복(1758~1814?)의 미인도에 얽힌 일화가 있습니다. 미인도를 다듬고 채색하며 퍽 마음에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제 침대 곁에 걸어 놓고 흡족해했습니다. 그런데 꿈에 미인도의 그 아름다운 여성이 나타난 겁니다. 깜짝 놀랐지요. 그 후 미인도를 이 전시실로 옮겨 놓았습니다.


대구 진골목에 있는 ‘미도다방’에 작은 미인도를 선사했습니다. 계산대 옆에 걸어 두었는데, 누군가 가져갔다고 정인숙 대표가 안타까워하길래 다시 한 점을 건넸습니다.



◆방황의 시기 마주한 서각


-‘서각의 세계’로 들어선 과정이 궁금합니다.


▶원래 경제학을 전공했습니다. 지금의 서울 롯데백화점 본점 즉 소공동 1번지에 국립도서관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공부하고 있는데, 고등학생인 한 소녀가 다가왔습니다. 영어 해석을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인연이 시작됐지요.


대학 2학년 때 군대를 가서 철원으로 배치를 받았습니다. 그녀가 2주일에 한 번씩 면회를 왔습니다. 제대 후, 고시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경북 봉화에 있는 절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 어머니에게서 전보가 날아왔습니다. 서울에 좀 다녀갔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습니다.


서울로 올라가니, 그녀가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위암이었습니다. 그녀가 침대에 누운 채 결혼하고 싶다는 얘길 했습니다. 눈물이 나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명동 성모병원에서 주치의 허락 아래 신부님, 수녀님을 모시고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식을 올린 지 세 시간 만에 그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13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습니다. 산으로 절로 다니며, 서서히 건물의 현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서각의 세계’로 들어온 것입니다.


백랑은 퇴계의 후손으로 성학십도 복사본을 판각했다. 그가 손을 얹은 것이 성학십도 [사진=이현아 기자]

◆강화도 외 지역에서도 만들어진 대장경판


-팔만대장경 서각 연구에도 몰두했다고 들었습니다.


▶처음 칼을 잡은 곳은 강화도 선원사였습니다.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진 장소로 알려졌지요. 그 후, 혜암 스님의 배려로 경남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서 국보 제32호인 대장경판의 목재와 서각을 연구했습니다. 한 달 동안 대장경판에만 매달렸습니다. 그때 ‘고려국대장도감(高麗國大藏都監) 남해분사도감(南海分司都監)’이라는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모두 48장이었습니다.


그 조성 경로와 목재 등을 연구하기 위해 1997년 말부터 2000년 3월까지 경남 남해에서 지냈습니다. 연구 결과는 남해문화원과 공동 작업으로, 보고서로 만들어졌습니다. 지금 경남 문화재 관리청에 보관돼 있습니다.


-퇴계 이황의 16대손으로 ‘성학십도(聖學十圖)’ 복사본을 판각했습니다.


▶‘성학십도’는 말년의 퇴계(1502~1571) 선생이 17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선조(1552~1608)를 위해 올린 상소문입니다. 판목이 남아 있는 건 영주 소수서원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며 글자가 마모돼 복제가 시급했습니다. 2010년 영주 시장에게 건의해서 판각을 복제했습니다. 그때 다섯 질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영주 소수서원에, 하나는 안동 도산서원에, 두 질은 일본 와세다대학교에, 남은 하나는 영국 왕실에서 가져갔습니다. 가지고 싶어 하는 분이 많아서 탁본을 나눠주기도 하고, 지금도 성학십도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10폭을 만드는 데 2년이 걸립니다. 퇴계 선생이 남긴 정신적 유산은 국경을 넘어 여러 나라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나무는 은행나무, 돌배나무, 느티나무, 물푸레나무, 대추나무 등을 사용합니다. 결이 단단하고 나무무늬가 아름다워 서각에는 제격입니다. 서각에 쓰는 나무는 11월 중순부터 1월 중순까지 ‘물 내리기’ 한 나무를 베어서 씁니다. 나무를 음지에서 통나무로 3년 건조 후, 다시 켜서 판재로 만들어, 또 3년을 말린 후 비로소 서각 재료로 쓸 수 있습니다. 나무를 사서 칼을 댈 때까지 7년이 걸리는 셈입니다.



백랑 뒤로 보이는 작품은 곧 병풍으로 만들어진 '3.1독립선언서'다. 곧 천안 독립기념관으로 보내진다. [사진=이원선 기자]


◆외솔 최현배의 ‘우리말 사랑’에 눈물


-‘서각’을 삶에 비유한다면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요?


▶제가 서각을 만나기까지 오랜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서각의 재료로 쓰이는 나무를 만나고 칼을 잡고 글을 새기는 데에도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고 그 감동을 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해서는 참고 아픔을 견디는 세월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일에 단련이 필요하듯이….


하지만 각(刻)에 몰입하다 보면 어떻게 시간이 흐르는지 모릅니다. 이제 작업을 그만하고 자리에 누워야지 하고 창밖을 내다보면, 이미 날이 밝고 있습니다. 나를 깎고 다듬는 작업. 그 글과 그림을 그린 이의 마음을 따라가면, 나와 그가 만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작품은 보는 이에게도 감흥이 그대로 전달됩니다. 오랜 시간 거쳐 완성되는 서각에서 내면의 평화를 얻습니다.


곧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으로 보낼 ‘3·1독립선언서’를 완성했습니다. 얼마 전 최현배 선생의 글을 병풍으로 만들어 울산에 있는 ‘외솔기념관’으로 보낸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마흔여섯이라는 늦은 나이에 결혼했습니다. 작업에만 신경 쓰는 남편을 이해하고 뒷바라지해 준 아내와 하나뿐인 딸에게는 미안한 마음입니다.


백랑 이정환은 와세다대학교에서 여든다섯에 ‘퇴계가 일본 정신문화에 끼친 영향’이라는 논문으로 인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남해, 영주, 경주를 거쳐 지금은 대구에서 ‘백랑 서각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미국 LA 전시회를 시작으로 뉴욕과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국내에서도 안동을 비롯한 각지에서 여러 차례 서각전(書刻展)을 연 바 있다.


백랑 이정환의 작업실은 간결하다. 그 흔한 TV나 컴퓨터도 없이, 사각사각 새김질 소리만 들릴 뿐이다. 탐욕을 덜어내고, 번민을 떨어뜨려 뼛속 정수(精髓)만 남은 그의 '서각'을 빼닮았다.






관련기사
TAG
0
푸른방송_241205
대구FC_241205
계명문화대_241224
이월드_241205
영남연합포커스_241205
구병원_241205
인기글더보기
최신글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