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가장 남동쪽, 유가읍 달창저수지 동편에 본말리(本末里)라는 마을이 있다. 과거에는 이곳을 ‘말역’이라 불렀는데 지금처럼 본말리가 된 것은 이곳에 말역면사무소가 있어 ‘본(本)’ 말역이라 한 것에 유래한 것이다. 본말리 북동쪽은 비슬산 남쪽 줄기인 비둘산(646.8m)이, 남서쪽은 달창저수지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 본말1리 노인회관 인근 국도변에 잘 지어진 정려각이 하나 있다. 이 정려각은 효자 김처정과 열부 재령이씨를 기리는 효열각(孝烈閣)으로 두 인물은 시할아버지와 손자며느리 사이다.
2) 효자(孝子) 김처정(金處精)
김처정(1603-1670)은 청도김씨로 시조인 고려 수태부 중서시랑 평장사 영헌공 김지대의 18세손으로 호는 순재(純齋)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남달랐다. 특히 효행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무려 30년이란 세월 동안 불치병에 시달렸던 아버지를 돌본 효자였다. 처음 10년은 아버지를 위해 지극정성으로 약시중을 들었고, 이후 20년은 아버지를 위해 인유(人乳·사람의 젖) 봉양을 했다. 이러한 김처정의 효행에 대해 효열각 내에 걸려 있는 정려편액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효자 김처정은 일찍부터 행실이 뛰어나 인물을 천거하는 문서에 이름이 자주 올랐다. 부친에게 고질병이 있어 30년 간 약시중을 들었는데 그 정성이 한 결 같았다. 하지만 부친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나중에는 아무런 음식도 먹지 못한 채, 20년 세월 동안 오직 인유(人乳)만 먹었다. 하지만 김처정은 항상 젖을 주는 유녀들에게 의복 등을 나눠 주고 직접 나아가 울면서 젖을 얻었으니, 한 번도 부친에 대한 인유봉양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한 번은 부친이 메추리를 먹고 싶다고 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매 한 마리가 나타나 메추리를 집 마당에 떨어뜨리고 날아갔다. 또 한 번은 의원이 말하기를 ‘부친의 병에는 노루고기가 좋다’ 하니 어디선가 사냥꾼이 노루를 짊어지고 그의 집에 나타나 김처정의 호인 ‘순재’를 불렀던 일도 있었다. 이러한 일들이 조정에 알려져 숙종 기묘년[1699년]에 정려를 내리니 그 사실이 『포산지』에 실려 있다.
아이도 아닌 성인이 사람의 젖을 구해 먹는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것도 20년 동안이나 말이다. 이렇듯 ‘인유봉양’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만큼 세상에 그 사례도 드물다. 하지만 매가 메추리를 물어다 주고, 사냥꾼이 노루를 가져다주는 등의 스토리는 효자스토리에서 자주 발견되는 기본 텍스트다.
3) 열부(烈婦) 재령이씨
앞서 언급한 인유봉양 효자 김처정의 손자에 김여탁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의 처는 재령이씨였는데 열부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효자로 이름난 시조부 김처정과 열부로 이름난 손자며느리 재령이씨. 역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옛말 하나도 그른 게 없다. 재령이씨는 남편인 김여탁이 병을 얻어 자리에 눕자 밤낮으로 병구완을 했다. 하지만 끝내 남편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재령이씨도 남편의 뒤를 따라 자진하려 했지만 때마침 뱃속에 아이를 잉태하고 있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얼마 후 재령이씨는 아이를 출산한 뒤 식음을 전폐해 자진했다. 이 사실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열부정려가 내렸다. 효열각 내 정려편액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남편이 죽은 뒤에 유복자를 위해 죽지 않고 기다렸다가 출산 후에 식음을 전폐하고 자진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다. 그 일이 알려져 숙종 기묘년[1699년]에 정려를 내렸는데 그 사실이 『포산지』에 실려 있다.
재령이씨 이야기는 열부스토리에서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텍스트다. 남편이 죽고 난 뒤 부인도 그 뒤를 따른다는 텍스트인데 내용에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이 비슷하다. 이를테면 남편이 죽자 그날 밤 자결, 아니면 3년 상을 다 치루고 자결, 또는 자식이 없을 경우에는 양자를 세워 후사를 도모한 뒤에 자결한다는 식이다. 이는 지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개인을 넘어 국가차원에서 적극 장려했던 여성 최고의 덕목이었다.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재령이씨 부인과 같은 조선시대 여인들의 열부행. 그에 대한 가치판단은 독자 개개인의 자유다.
4) 효자와 열부를 기리다, 효열각
정려(각)는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표창쯤 된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보니 정려는 한 개인을 넘어 한 문중, 한 고을의 자랑이다. 하긴 요즘도 대통령 표창을 받으면 아파트나 동네 입구에 현수막을 내거는 데, 하물며 임금이 내린 정려이니 오죽했겠는가. 효자 김처정과 열부 재령이씨를 기린 효열각은 하나의 건물 안에 2칸의 공간을 갖춘 형식이다. 출입문에는 ‘효열각’이라 편액 되어 있고, 효열각 앞 거대한 표지석에는 ‘청도김씨정려(금산파문중)’라 새겨져 있다. 효열각은 나지막한 흙돌담에 안에 있는데 정면 2칸, 측면 1칸, 겹처마 맞배지붕양식의 목조 정려각이다. 정면에는 홍살이 설치되어 있고 측면과 뒷면은 흙벽이며, 건물전체에 모로단청이 칠해져 있다. 효열각 내부에는 각각 ‘효자증별검청도김공휘처정지려(孝子贈別檢淸道金公諱處精之閭)’와 ‘열부청도김공휘여탁지처유인재령이씨지려(烈婦淸道金公諱汝鐸之妻孺人載寧李氏之閭)’ 편액이 걸려 있다.
5) 에필로그
효열각은 처음부터 이곳 본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러 번에 걸친 이건이 있었는데, 1699년(숙종 25) 고령군 개진면 옥산동[강정]에 처음 창건, 1799년(정조 23) 현풍면 솔례로 이건, 1928년 유가면 유곡리 차천 상으로 이건, 1978년 유곡리 차천 하로 이건, 2004년 유가면 금리로 이건, 2011년 비로소 현 위치로 이건한 것이다. 현재 청도김씨 사정공파 금산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참고로 효열각 바로 인근에 잘 관리되고 있는 효행비각이 하나 더 있다. 안동김씨 김연묵의 처 고령김씨의 효행을 기리는 효행비각이다. 1924년에 건립된 이 비각은 달창저수지를 조성할 때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