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우리는 효를 자식이 부모에게 행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유가에서 말하는 효의 의미는 꼭 그렇지만도 않다.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인 ‘자(慈)’ 역시 효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이 어떻게 효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번에는 임란의병장 곽재우의 아버지인 곽월과 그를 기리는 재실인 앙모재를 통해 효의 또 다른 측면에 대해 한 번 알아보기로 하자.
2) 현곽팔주(玄郭八走)
솔례 현풍곽씨 문중에는 ‘현곽팔주’라는 말이 전해온다. 이 말은 현풍곽씨 ‘주(走)’ 자 항렬의 훌륭한 인물 8인을 말한다. 좀 더 풀어 설명하면 이렇다. 소래[솔례]곽씨로 알려진 현풍곽씨 청백리공파 파조 곽안방의 현손[고손] 대에 이르러 8명의 훌륭한 인물이 배출됐다. 이들로 인해 문중이 크게 일어났는데 이들은 모두 8촌간으로 이름에 ‘주(走)’ 자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들 현곽팔주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다. ‘곽초, 곽월, 곽규, 곽익, 곽간, 곽황, 곽율, 곽준’ 이중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곽월이다.
3) 정암(定庵) 곽월(郭越)
곽월의 자는 시정(時靜)이요, 호는 정암(定庵)이다. 1518년(중종 13) 승지 곽지번의 둘째 아들로 출생, 1586년(선조 19) 향년 69세로 졸했다. 어려서부터 몸가짐이 신중했고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했다. 1546년(명종 1) 사마시를 거쳐 1556년(명종 11) 별시문과에 급제,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의 정자에 발탁됐다. 그 후 대동찰방, 영주군수, 사헌부 지평·장령, 사간원 사간, 의주목사에 제수되어 통정대부에 올랐으며, 영주와 의주에는 그의 덕을 기린 송덕비와 흥학비가 세워졌다. 호조참의에 이어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79년(선조 12)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후 청송부사, 남원부사를 역임했다. 그는 활을 잘 쏘았는데 조정에서는 그가 문무의 재주를 겸비했기에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고 한다. 그의 인물됨과 관련해서는 동인의 영수인 김효온의 손자이자, 인조 때 이조참판을 역임한 동명 김세렴이 지은 신도비문[1633년]에 흥미로운 일화 몇 가지가 전한다.
○ 곽월이 대동찰방으로 있을 때 윤원형이 척신으로서 임금의 총애를 믿고 으스대기가 심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보기를 마치 벌레 보듯이 했다. 어느 날 곽월이 윤원형의 종이 도포를 입고 신을 신은 채 계단을 오르는 것을 보고는 노하여 매질을 하였더니 그 일을 전해들은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 한때 나라에서 주현에 어사를 파견하였는데 심한 불법이 드러날 경우에는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러한 암행사찰을 호행(虎行)이라고 불렀다. 한 번은 곽월이 관아에서 송사를 보고 있었는데 어사 윤근수가 갑자기 들이닥쳤다. 그러나 곽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이에 윤근수가 곽공의 그릇을 극찬하여 말하기를 “내가 암행하여 주현을 살핀 적이 많지만 일 처리가 조용하기를 이 사람 같이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 곽월이 남원부사로 있을 때 관찰사가 기생을 끼고 남원 땅을 지나자 공이 노하여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무시하는 것이다. 노부(老父)는 비록 폐퇴하고 관찰사가 비록 존귀할지라도 어찌 기생을 끼고 내가 있는 부를 지나갈 수 있는가” 하고 기생의 음식을 준비하지 않았다. 이 일로 공은 관찰사의 미움을 받아 남원부사에서 파직됐다.
4) 우러러 사모하는 집, 앙모재
앙모재(仰慕齋)는 곽월을 추모하고 기리는 재실이다. 하나의 대문 안에 ‘앙모재’는 물론 곽월의 ‘종택’과 ‘불천위 사당’까지 한데 모여 있다. 현재 앙모재가 자리하고 있는 유가읍 한정리는 곽재우를 제향하고 있는 가태리 예연서원 옆 동네로 본래 원산고리(元山古里)로 불렸던 곳이다. 이곳에는 예전부터 가태리에서 옮겨온 곽월의 불천위 사당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후 60여년의 세월이 흐르자 사당은 퇴락하여 중건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문중원들이 모여 옛 사당과 종택을 새롭게 중건·신축하기로 결정했다. 목재는 강원도, 석재는 강화도에서 구입하여 지난 1997년 말 공사를 시작, 1998년 말 완공했다. 건물배치는 전면에 높게 서 있는 솟을 외삼문 뒤에 종택이 있고, 종택 뒤에 재실인 앙모재와 불천위사당이 각각 좌우에 자리하고 있다. 멀리 국도변에서 이 마을 쪽을 바라보면 이들 앙모재 건물들의 웅장한 기와 지붕선이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또한 종택에는 곽월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포도연, 연적, 백자화문을 비롯한 곽월의 친필 유묵 등이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인근 가태리 야산 기슭에는 이양서원·예연서원과 더불어 이른바 현풍곽씨 3대 서원으로 불린 남계서원이 있었다. 곽월을 제향한 남계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이후 남계서당으로 복원되었으나 지금은 퇴락한 상태다.
5) 에필로그
이 글의 서두에서 필자는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도 효라고 밝힌 바가 있다. 이는 필자 개인의 의견이 아닌 유가의 가르침이다. 유가에서는 신체를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고, 몸을 세우고 도를 행함으로써 세상에 이름을 내고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의 마지막이라고 가르친다. 곽월은 셋째 아들 곽재우를 잘 가르쳤다. 곽재우는 세상에 나아가 이름을 떨쳤고 이로 말미암아 곽재우는 조정으로부터 부·조·증조 3대에 걸친 추증[벼슬을 더해 줌]의 은전을 받았다. 다시 말해 자신이 잘 가르친 아들[곽재우] 덕에 자신[곽월]은 물론 부·조까지 세상에 이름이 나고 벼슬이 더해졌으니 이 또한 효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런 연유로 유가에서는 자식에 대한 사랑 역시 효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곽월은 평생 스스로 쌓아올린 명예 외에도 잘 가르친 아들 곽재우 덕분에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 춘추판사 세자좌빈객’에 추증됐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