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2019년 여름, 드디어 도동터널이 임시 개통 됐다. 이 터널은 현풍읍과 구지면의 경계인 다람재를 관통하는 터널이다. 차량으로 다람재 초입에서 다람재를 넘어 도동서원까지 가려면 5분 정도 시간이 소요되지만 이 터널을 이용하면 단 30초면 된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시간이 단축되고 이동이 편리해진 만큼 잃어버리고 놓치는 것이 있다. 지금처럼 다람재 정상에 올라 도동서원과 낙동강 그리고 강 건너 고령 땅을 느긋하게 조망하고, 한훤당 선생의 시비를 감상하는 즐거움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다람재길을 포기하면 또 하나 잃어버리는 것이 있다. 바로 다람재길과 이어져 있는 ‘정수암(淨水菴)’이란 산중 암자다.
2) 여묘살이·시묘살이·3년상
전통예법 중에 ‘여묘살이’란 게 있다. 상주가 된 아들이 돌아가신 어버이의 무덤가에 초막을 짓고 3년간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을 말한다. 다른 말로는 ‘시묘살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노파심에서 한 말씀 거들자면 많은 사람들이 ‘여묘살이’와 ‘3년상’을 혼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묘살이와 3년상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여묘살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어버이의 무덤가에 초막을 짓고 그곳에 거처하면서 무덤을 지키는 행위다. 이에 반해 3년상은 여묘살이 여부와는 상관없이 어떠한 형태로든 3년이라는 기간 동안 상례에 따른 예법을 지키는 행위를 말한다. 필자의 지인 중에 3년상을 치룬 이가 있다. 집안 한 쪽 공간에 병풍을 치고, 어버이의 영정을 모시고, 아침·저녁 혹은 초하루·보름 상식을 올리는 현대식(?) 3년상을 치렀던 것이다. 이처럼 3년상은 사람에 따라서는 지금도 행할 수 있지만, 여묘살이는 글쎄, 정말 쉽지 않을 것이다. 3년상은 유교 예법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3년일까? 그 답은 『논어』에 나오는 공자와 그의 제자 재아의 문답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재아가 말했다. “3년상은 1년만 하더라도 너무 길다고 할 것입니다. 군자가 3년 동안 예를 행하지 않으면 예가 반드시 무너질 것이고, 3년 동안 음악을 익히지 않으면 음악이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묵은 곡식이 이미 다하고, 새 곡식이 이미 상에 오르며, 불씨 만드는 나무도 바뀌어졌으니, 1년이면 그칠 만한 것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상을 당한지 3년 안에)쌀밥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는 것이 너는 편하더냐?” 재아가 대답했다. “편안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편안하면 그렇게 하여라. 군자가 상을 치를 때에는 맛있는 것을 먹어도 달지 않으며,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으며, 거처함에 편안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인데, 네가 편안하다면 그렇게 하여라.” 재아가 밖으로 나가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재아는 참으로 인(仁)하지 못하구나. 자식은 태어나서 3년이 지난 뒤에야 부모의 품을 벗어나게 된다. 3년상은 천하의 공통된 법이거늘, 재아는 3년의 사랑을 그 부모로부터 받지 못하였던가! (『논어』, 「양화편」)
동물은 사람과는 달리 태어나 조금만 지나면 걷고 뛰고 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3년 동안 어버이의 품에서 길러진 뒤라야 그 품을 떠날 수 있다. 이처럼 어릴 적 어버이의 품에서 받았던 3년간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3년이란 상기가 정해진 것이다. 참고로 3년상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만3년’이 아닌 ‘햇수 삼년’이다. 다시 말해 36개월이 아닌 25개월이다.
3) 한훤당 선생 이하 3대가 여묘 살던 곳
정수암은 그 유래가 가까이에 있는 도동서원보다 무려 117년이 앞선다. 도동서원이 세워지기 전인 한훤당 김굉필 선생이 살아 있을 때 세워졌다. 물론 지금 건물은 당시 건물은 아니다. 정수암이 처음 세워진 것은 1487년(성종 18)이다. 김굉필 선생이 부친 김뉴의 상 때 3년 여묘살이를 할 목적으로 세운 것이 그 시초다. 그 뒤로는 선생의 장자인 김언숙이 이곳에서 어버이 상에 6년 여묘를 했고, 그 뒤 다시 선생의 장손인 김대 역시 이곳에서 6년간 어버이 상에 여묘를 했다. 이후 1626년(인조 4) 선생의 5세손 김대진이 앞장서 후손들의 도움을 받아 정수암을 중건했다. 1956년에 작성된 이원윤의 「정수암기」를 참고해보면, 1626년 정수암 중건 당시 본채는 3칸이었는데 가운데는 마루, 양쪽은 방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앞쪽에 4칸 집이 있었는데, 부엌과 창고 그리고 방이라고 되어 있다. 「정수암기」에 묘사된 기록과 현재의 정수암을 비교해보면 건물의 수와 위치는 일치하지만 건물의 칸수에는 다소 변형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정수암은 불교 암자로 사용되고 있다. 옛 건물로는 법당과 요사채 그리고 대문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근래에 신축한 건축물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수암은 예로부터 샘이 유명했다. 가뭄이나 홍수에도 항상 일정 양의 차고 맑은 샘물이 솟는데, 대니산 중턱 암반에서 솟는 샘물인 만큼 물맛 좋기로 소문이 났다. 지금은 샘물을 물탱크에 저장한 뒤 호스를 연결해 수도처럼 사용하고 있다. 정수암에서 꼭 한번 살펴봐야 할 곳이 있다. 법당과 산신각 사이 바닥에 있는 기이한 형태의 바위가 그것이다. 마치 부처님 머리마냥, 엠보싱 화장지 표면마냥 볼록볼록한 것이 정말 특이하다. 평생을 이 동네에서 살았다는 한 어르신의 말씀에 의하면 대니산에서 이런 형태의 바위는 오직 이곳밖에 없다고 한다. 풍수가들 중 일부는 지기(地氣)가 흙보다는 바위을 타고 더 잘 흐른다고 한다. 그래서 바위 위에 얹혀 있는 기도처가 기도빨이 더 잘 받는다고.
4) 에필로그
도동터널 임시 개통으로 한 두 달 간 대형버스와 덤프트럭들이 다람재길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벌써 다람재 길가 나뭇가지들이 웃자라 대형차량들의 통행을 방해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아마도 조만간 대형버스를 이용하는 단체 답사객들은 다람재 정상에서 누려왔던 호사를 더 이상은 누릴 수 없게 될 것 같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19년 10월 28일 오전 도동서원. 때마침 한훤당 김굉필 선생 묘사가 봉행 중이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