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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86. 왜적들도 감동했다, 사효굴(四孝窟)
  • 푸른신문
  • 등록 2019-10-0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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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비슬산 서쪽 유가읍 양리에는 천년고찰 유가사가 있다. 유가사는 용연사·대견사 등과 더불어 비슬산의 불교유적을 대표하는 사찰 중 한 곳이다. 그런데 이 유가사로 가는 국도변에 ‘사효굴(四孝窟)’ 혹은 ‘사효자굴(四孝子窟)’로 불리는 유적이 한 곳 있다. 이번에는 앞서 살펴본 ‘현풍곽씨12정려각’과도 관련이 있는 사효굴에 대해 한 번 알아보기로 하자.

2)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요즘 뉴스를 통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끔찍한 사건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제일 끔찍한 사건은 아무래도 인륜을 저버린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부모와 자식, 형제, 부부간을 가리지 않고 반인륜적인 사건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도대체 어찌하다 세상이 이 지경에까지 오게 된 것일까? 유교에서는 이 같은 인륜에 관계된 문제는 ‘효제충신(孝悌忠信)’, 사회기강의 문제는 ‘예의염치’를 그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이 중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고 나라에 충성하고 벗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게 효제충신이다. 그렇다면 ‘효제충신예의염치’ 여덟 가지 덕목 중 제일 앞에 나와 있는 효는 과연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으로 필자가 즐겨 인용하는 유교경전 문구가 있다. 『효경』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구다.


‘신체와 털과 피부는 부모에게 받은 것이다. 감히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고, 몸을 세우고 도를 행함으로써 후세에 이름을 떨쳐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의 마지막이니…’


그렇다. 유가에서 말하는 효는 제 몸을 온전히 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출세하고 도를 행하는 단계를 거쳐, 종국에는 부모의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과연 성인의 말씀답다. 


3) 곽재훈과 4효자


때는 지금으로부터 450여 년 전 조선중기 선조임금 시절이었다. 비슬산자락 현풍현에 곽재훈(郭再勳)이라는 선비가 살고 있었다. 그는 임란의병장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사촌형으로 슬하에 효행으로 이름난 곽결·곽청·곽형·곽호 네 아들을 두었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며칠 만에 평화롭던 현풍고을에도 왜적들이 들이닥쳤다. 고을 백성들은 왜적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피난을 떠났다. 하지만 곽재훈과 그의 네 아들은 다른 백성들처럼 먼 곳으로 피난을 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곽재훈이 중병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풍 지리를 잘 알고 있었던 4형제는 어쩔 수 없이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현풍현 동쪽 비슬산 자락의 한 바위 굴속에 숨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이들이 숨은 바위굴 아래로 왜적들이 지나갔다. 그런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날따라 곽재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결국 기침소리 탓에 바위굴에 숨어 있던 곽재훈과 그의 네 아들은 왜적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왜적이 칼로써 이들을 해치려 하자 4형제가 차례대로 막아섰다. 4형제는 죽음을 무릅쓰고 아버지를 호위하다가 하나, 둘 차례대로 왜적의 칼에 죽임을 당하고, 결국 그 아버지만이 홀로 살아남았다. 그런데 제 아무리 오랑캐인 왜적들이었지만 눈앞에서 벌어진 4형제의 효행에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적들은 곽재훈을 살려주면서 그의 등에다 ‘四孝子之父(사효자지부)’라는 다섯 글자를 쓴 나무패를 매달아 보냈다. 이 나무패를 본 왜적들은 더 이상 그를 해치지 않았다. 임란이 끝난 뒤 이러한 4형제의 효행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왕명으로 효자정려가 내려왔다. 또한 고을사람들은 굴 입구 바위에다 ‘四孝窟’ 세 글자를 새겨 이들 4형제의 효행을 기렸다. 현재 솔례마을 입구에 있는 현풍곽씨12정려각의 ‘효자사공(孝子四公)’ 정려가 바로 곽재훈의 네 아들 곽결·곽청·곽형·곽호의 정려다.


4) 사효굴 바위글씨


사효굴 주변의 바위를 잘 살펴보면 ‘사효굴’이라 새겨진 바위글씨가 두 곳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사효굴 글자 아래에 ‘종구세손곽주곤(從九世孫郭柱坤)’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그 곁에 사효굴보존계원 1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다른 하나는 사효굴 세 글자와 함께 그 아래에 면우 곽종석 선생의 효자사공 추모시가 새겨져 있다. 이처럼 사효굴 바위글씨가 각기 다른 곳에 중복으로 새겨진 것은 그 까닭이 있다. 둘 중 먼저 새겨진 바위글씨는 전자에 해당하는 4효자의 종9세손 곽주곤이 쓴 글씨다. 이 글씨는 대략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을 전후한 시기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바위글씨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바위글씨는 묵은 이끼와 나무 덩굴에 뒤덮이면서 영영 잊혀지는 듯했다. 그런 와중에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 곽종간 선생이 사효굴 주변의 바위에 ‘사효굴’ 글씨와 함께 곽종석 선생의 시를 새겼으니 이것이 뒤에 새겨진 사효굴 바위글씨다. 이는 사효굴에 ‘사효굴’ 바위글씨가 있었다는 옛 구전에 따른 것이었다.


5) 에필로그


100여 년 전에 새겨진 곽주곤의 ‘사효굴’ 글씨가 사라지지 않고 다시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현풍곽문의 또 다른 두 인물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었다. 지난 2005년 12월, 곽태환·곽정섭 두 선생은 주위의 아무런 도움 없이 자발적으로 사효굴 정화사업을 시작했다. 이때 우연히 담쟁이덩굴에 속에 묻혀 있던 사효굴 세 글자[2006.2.25]와 사효굴보존계원 명단[2006.3.4]을 발견했던 것이다. 참고로 이들은 2005년 12월부터 무려 6개월간에 걸쳐 아무런 보상도 없이 주말과 공휴일을 이용해 사효굴 정화사업을 했다고 한다. 참고로 사효굴 초입 계곡에는 ‘상성폭포’와 ‘유학곽공종호함정보탁신비(幼學郭公鍾昊函井洑拓新碑)’ 그리고 폭포너머로 나무와 돌담에 둘러싸인 ‘이애정(二愛亭)’이 있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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