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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84. 대구지역 전의이씨 문중의 성지, 이유재
  • 푸른신문
  • 등록 2019-09-1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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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앞서 우리는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 낙동강가에 자리한 유서 깊은 정자 하목정과 전양군 이익필 불천위사당에 대해 이미 살펴본 적이 있다. 이 둘은 달성군 하빈면과 고령군 다산·상곡 일원에 세거하고 있는 전의이씨 문중의 대표유적이다. 그런데 이 두 유적만큼이나 의미심장한 유적이 우리고장에 또 있다. 바로 하빈면 기곡리[터실]에 있는 이유재(履有齋)라는 재실이다.  


2) 시조 이도, 중시조 이천


현재 우리나라 이씨의 본관 수는 어림잡아도 100여개가 훨씬 넘는다고 한다. 물론 관련 옛 문헌에 의하면 이씨의 본관은 451본[증보문헌비고], 546본[조선씨족통보] 등으로 나타난다. 그 중 세종시 전의면을 본관으로 하는 이씨가 있으니 ‘전의(全義)이씨’다. 전의이씨 시조는 고려개국 공신인 ‘이도(李棹)’라는 인물이다. 그는 공주 금강일대의 대호족장으로 본래의 이름은 ‘이치’였으나 고려개국에 공을 세워, 태조 왕건으로부터 높은 벼슬과 함께 ‘이도’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이후 이도는 전의의 ‘이성(李城)’으로 거점을 옮겨 누대의 세거지로 삼았으니 ‘전의’라는 본관은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 이도의 풀네임은 ‘고려통합 삼한개국 익찬공신 삼중대광태사 전산후 성절공 이도’이다. 한편 전의이씨 중시조에 7세 동암수(東巖叟) ‘이천(李仟)’이라는 인물이 있다. 응양군대장군 지예부사 중서시중 문하평장사를 지낸 그는 몽고 침입 때 고려 수군을 이끌고 항몽전을 펼쳐 공을 세웠는데, 그 사실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지난 1994년에 우리 해군 국산 잠수함 1호 ‘이천함’이 취역했는데, 이때 잠수함의 이름 이천이 전의이씨 중시조 이천의 이름을 취한 것이다. 이천은 슬하에 ‘이자원·이혼·이자화’ 3형제를 두었다. 전의이씨는 이들 3형제를 파조로 하여 처음으로 3개 파가 나눠지고, 이후 많은 지파를 형성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구지역을 연고로 하는 전의이씨 예산공파는 위 3형제 중 막내인 8세 이자화의 후손으로 대구 입향은 15세 ‘이필(李馝)’에 의해서다.
  
3) 전의이씨 대구 입향조 이필


이필은 서울 태생으로 예산현감을 지냈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대략 조선중기 명종 조 이전에 연고지인 경기도 부평을 떠나 대구 하빈으로 이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대구 입향과 관련해 자세한 내용은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그의 아들과 손자의 사적을 통해 어느 정도 추측은 가능하다. 당시는 4대 사화의 광풍이 휘몰아치던 시기로 뜻있는 선비들이 벼슬을 내려놓고 시골에 은거하는 풍조가 만연한 때였다. 따라서 이필의 대구 입향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후손들의 생각이다. 여하튼 이필에 의해 처음 하빈에 터를 잡은 영남의 전의이씨는 그의 아들 이경두, 손자 이종문·이종택, 증손자 수월당 이지영·다포 이지화·부용당 이지발·임하처사 이지시를 거치면서 비로소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중 이지영과 이지화 형제는 문과에 급제했다. 이들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각각 터전을 마련했다. 이지영의 후손들은 하빈면의 하산·동곡·기곡, 이지화의 후손들은 강 건너 고령의 다산·상곡, 이지발과 이지시의 후손들은 다사면 부곡리 일원 등이다.


4) 선조를 추모하는 집, 이유재


‘이(履)’ 자는 ‘첨(瞻)·모(慕)·추(追)·원(遠)·보(報)·본(本)’ 등과 더불어 재실의 이름에 자주 사용되는 글자로 출전은 『예기』 「제의」이다. 그 내용을 보면 군자는 봄과 가을에 이슬과 서리를 밟으면 두렵고 슬픈 마음이 드는데, 이는 추위 때문이 아니라 선조를 추모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유재는 달성군 하빈면 기곡리에 있다. 이유재 바로 앞산이 전의이씨 예산공파 선대의 선영이다. 이곳에는 대구 입향조인 이필, 그의 아들인 이경두, 손자인 이종문·이종택, 증손인 이지영, 현손인 이전까지 5대에 걸친 선대 묘소가 있다. 말 그대로 대구지역 전의이씨의 혈연적 뿌리이자 정신적 고향이라 할 만하다. 이 선영을 수호하고 묘제를 받들기 위한 재실이 바로 이유재다. 이유재가 언제 처음 건립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인이 어렵다. 다만 알려진 바로는 1917년에 기존의 쇠락한 이유재를 중수했다는 것이다. 이는 선영 아래에서 오랜 세월 문중 일을 보았던 문중 원로들의 증언에 근거한 것이다. 참고로 1917년 중수 당시 발견된 옛 상량문에는 상량 연도가 정유년[1897년]으로 표기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후 1967년 또 한 번의 중수가 있었으며, 현재의 이유재는 2014년 봄에 낙성을 했다. 참고로 기곡리 마을입구 길가에 ‘전의이씨의관지장(全義李氏衣冠之藏)’이라 새긴 오래된 표지석이 하나 있다. 이는 이 지역이 전의이씨 선대 선영이 있는 곳임을 나타내는 표지석으로 1774년(영조 50)에 세운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이유재의 초창 연대는 1897년 보다 훨씬 더 이전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유재는 주변지대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자리해 있다. 계단을 올라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이유재 편액을 단 정당이 있다. 정면 5칸, 측면 1.5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전면으로 반 칸 퇴 칸을 두고 5칸 모두 유리창호를 설치했다. 솟을대문 바깥에는 ‘전의이씨낙남대구입향시조통덕랑행예산현감공사적비’를 비롯한 몇 기의 추모비와 이유재의 내력을 새긴 공적기·중건기 등이 서 있다. 


5) 에필로그


달성군 하빈면 기곡리 이유재에서 차량으로 10여분 거리에 전의이씨 문중의 랜드마크인 하목정과 전양군 이익필 불천위사당이 있다. 하목정은 조선시대 인조 임금과 낙포 이종문, 수월당 이지영 부자의 대를 이은 ‘인연이야기’와 ‘부연이야기’ 등 꽤나 흥미로운 스토리가 담겨 있는 공간이다. 물론 과거 명사십리로 유명했던 낙동강가에 세워진 규모 있는 정자인 만큼 주변경치 또한 더 이를 데가 없다. 가을에 한 번 다녀오기에 참 좋은 곳이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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