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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77. 쌍계서원→ 보로동서원→ 도동서원
  • 푸른신문
  • 등록 2019-07-1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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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필자는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로 매주 화요일마다 도동서원에서 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 만큼 이번 도동서원의 유네스코세계유산목록등재에 대한 생각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난번에 이어 도동서원 이야기를 조금 더 하려한다. 이번에는 ‘쌍계서원→보로동서원→도동서원’으로의 변천에 대해 한 번 알아보기로 하자.


2) 현풍읍 쌍계리 치마거랑마을의 ‘쌍계서원’


많은 사람들은 도동서원이 처음부터 지금의 자리에 세워진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도동이라는 서원의 이름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도동서원이었던 것은 아니다. 도동서원이 처음 세워진 곳은 지금의 현풍읍 쌍계1리 치마거랑마을의 초곡천변이다. 쌍계(雙溪)라는 동명은 마을이 초곡천과 구천[현풍천] 두 물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것에 유래한 것이고, 치마거랑은 말이 달리는 형국을 하고 있는 마을 뒤 치마산(馳馬山)과 마을 앞 거랑[川]을 합친 표현이다. 도동서원의 전신인 쌍계서원은 지금으로부터 451년 전인 1568년(선조 1), 쌍계리 북편 풍영대 아래 초곡천변에 처음 세워졌다. 이후 1573년(선조 6)에 쌍계서원으로 사액을 받고,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적들에 의해 소실되었다. 이처럼 쌍계서원은 아쉽게도 창건 29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문집인 『경현록』은 쌍계서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무진년(1568)에 현풍의 선비들이 선생을 위하여 읍내에서 동쪽으로 2리쯤 되는 곳에 서원을 세우고 사당을 세웠으니, 정당은 중정이요, 좌실은 동익이요, 우실은 서익이요, 동재는 거인이라 하고, 서재는 거의라 하였다. 또 구용료·구사료·사물료·삼성료가 있고 또 양정재가 있어 어린 학생들을 가르쳤고, 문은 환주라 하였다. 시내 위에다 장차 정자를 지어 명칭을 조한이라 하려고 하였으니 선생의 ‘지호명월조고한’이란 시에서 따온 것이다. 앞에 두 시내가 동쪽과 북쪽으로부터 흐른 까닭에 명칭을 쌍계서원이라 하고…


과거 쌍계서원이 있었던 자리에는 현재 민가가 들어서 있는데 그 입구에 ‘쌍계서원터’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쌍계서원이 사라진지 4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쌍계리 주민들은 쌍계서원 터 아래 도랑을 ‘서재(書齋)도랑’이라 부르고 있다.


3) 옛 구지읍 오설리 보로동의 ‘보로동서원


정유재란 때 소실된 쌍계서원은 7년 뒤인 1604년(선조 37) 현풍현 오설리 송림 보로동으로 옮겨 중건되었으니 바로 지금의 도동서원 자리다. 중건 당시 서원명은 ‘보로동서원’이었는데 이는 서원이 들어선 동네의 이름인 보로동(甫老洞)에 근거한 것이다. 처음에는 먼저 사우[사당]만 세우고 나중에 강당과 부속건물들을 세웠다. 서원을 기존의 쌍계리가 아닌 보로동으로 옮겨 중건한 까닭에 대해 『경현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옛터는 인가들이 곁에 가까이 있고 장터가 있어서 시끄러운 까닭에 공부하는데 적합하지 않았으며, 또 선생이 평소에 발자취가 미치지 않았던 곳이니 거기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또한 연고가 되지 못하므로 마침내 이곳에 옮겨지었다. 지금 먼저 사우만 세우고 재당과 주방과 창고 등은 미처 세우지 못하였다…


이처럼 서원을 보로동으로 옮겨 중건한 이유에 대해 한 가지 더 첨언을 하자면 보로동서원 뒤편에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묘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4) 현 구지읍 도동리의 ‘도동서원’


쌍계서원의 뒤를 이어 1604년 중건된 보로동서원은 3년 뒤인 1607년(선조 40), 도동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재사액을 받았다. 재사액이라 한 것은 이 서원이 ‘쌍계’에 이어 ‘도동’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사액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름과 관련한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처음에는 서원의 이름을 동명에 근거해 보로동서원이라 했다. 하지만 3년 뒤 도동서원으로 사액되자 이번에는 반대로 동명이 서원명을 따라 보로동에서 도동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도동리는 이렇게 하여 생겨난 것이다.
도동서원의 모습을 한 번 살펴보자. 우선 서원 앞쪽에 한강 정구선생이 심은 것으로 알려진 수령 400년의 거대한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다. 서원건물의 제일 앞쪽에는 휴식공간인 2층의 수월루가 있고, 그 뒤에 1칸 규모의 작은 문 환주문이 있다. 환주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면에 강당인 중정당이 있고, 좌우에 기숙사인 서재[거의재]와 동재[거인재]가 있으며, 강당 좌측에 목판을 보관하는 장판각이 있다. 중정당 뒤 내삼문 안쪽에 김굉필과 정구 두 선생의 위패를 봉안한 사우와 그 한쪽에 별도의 문을 내고 담장을 두른 증반소[제수를 준비하는 부엌]가 있다. 서원 바깥으로는 우측에 전사청이 있고, 좌측에 한훤당선생 신도비각이 있으며, 서원 뒤편으로는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김굉필 선생 묘소가 있다. 참고로 도동서원에는 옛날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건물이 두 동 있다. 하나는 고을의 훌륭한 인물들을 제향했던 별묘[별도로 지은 사당]로 사우 동쪽 담장 밖에 있었으며, 또 다른 하나는 아이들을 교육하는 공간인 양몽재로 서재 아래 담장 밖에 있었다. 


5) 에필로그


살펴본 것처럼 도동서원은 이번에 유네스코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 9곳 중, 3번 이름을 바꾸고 2번 이사를 한 특이한 내력이 있다. 이러한 내력들이 기록으로 잘 남아 있어 다행이다. 하지만 더욱 다행인 것은 옛 쌍계서원 터가 쌍계리 주민들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400여 년 간 잘 전해져 근년에 표지석을 세울 수 있었다는 점이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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