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서원철폐령’이란 말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 국가시책으로 우리나라 전역에 산재해 있던 서원과 사우에 대해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실시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기획되고 시행된 이 정책은 1868년을 전후한 시기에 시작, 1871년에 마무리되었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당시 700여개[1,000여개라는 설도 있다]의 서원·사우 중에서 살아남은 것은 단 47개에 불과했다. 그런데 서원도 사우도 아니면서 서원철폐령의 철퇴를 맞은 곳이 있다. 그것도 우리 고장인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말이다. 다름 아닌 ‘백록동서당(白鹿洞書堂)’이다.
2) 47개만 남기고 모두 없애라
서원과 향교는 조선시대 우리나라의 중등교육을 책임진 학교였다. 그런데 조선후기를 거치면서 서원의 정체성에 큰 변화가 생겼다. 서원의 주요기능인 강학과 제향 중 강학기능은 쇠퇴하고 제향기능만 중요시하게 된 것이다. 서원에 제향되는 인물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기존의 범국가적인 전국구 인물에서 당색·학맥·지역·가문 등을 대표하는 지역구 인물로 하향평준화된 것이다. 이로써 서원은 더 이상 학교가 아닌 지방 사족들의 세력거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현상은 현종·숙종·영조 때 심했는데, 특히 숙종 때만 무려 327개의 서원이 새로 건립되기도 했다. 서원의 범람은 결국 당쟁의 심화라는 부작용을 낳았고 그로 인해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이란 구조조정을 불러오게 된 것이다. 서원철폐의 기준은 도학과 절의가 월등히 뛰어난 인물에 한해서 ‘일인일원(一人一院)’, 다시 말해 한 인물에 대해서 한 개의 서원만 허락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서원들도 가만히 앉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적지 않은 수의 서원들이 편법을 통해 서원철폐를 피해갔다. 예를 들면 강당과 사당 중 어느 한 쪽 만을 살려 ‘쫛쫛사’ 또는 ‘쫛쫛서당’의 형태로 유지한다거나, 또는 강당과 사당 중 어느 한 쪽 건물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식으로 두 건물을 분리함으로써 철폐를 피했다.
3) 하양허씨 가창 입향조, 허욱
가야의 김수로왕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왕옥과 결혼해 슬하에 10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중 둘째 아들은 김수로왕의 배려로 김씨가 아닌 어머니의 성인 허씨로 대를 잇게 되었으니, 우리나라 허씨의 시작은 이때부터였다. 허씨는 고려시대에 와서 김해·양천·태인·하양 네 개의 본관으로 나뉜다. 이중 하양허씨는 고려 현종 때 호부낭장을 지낸 허강안이라는 인물을 시조로 한다. 하양허씨 중시조는 조선의 태조·정종·태종·세종 네 임금을 섬겼던 좌의정 경암(敬庵) 허조(許稠)다. 그의 아들은 문종의 고명대신이자 계유정난 이후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허후이고, 허후의 아들 허조( )와 손자인 허연령·허구령도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충신들이다. 이처럼 중앙의 관리로 진출해 한양에 터를 잡았던 하양허씨가 본관지인 하양과 다시 인연을 맺은 것은 허연령의 아들인 허충(許忠) 때부터였다. 허충이 단종 충신이었던 증조·조·부 3대에 불어 닥친 화를 피해 하양에 은거한 것이 계기였다. 한편 달성군 가창에 세거한 하양허씨는 경암 허조의 16세손인 허욱[許煜·1783-1850]의 후손들이다. 허욱은 자가 사규, 호는 수졸재·우당·회계 등이었는데, 하양을 떠나 처음으로 가창에 터를 잡았으니 이른바 하양허씨 가창 입향조다. 이거 후 그는 가창 땅에서 획득한 많은 농지를 바탕으로 문중의 번창과 강학활동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한 때 그는 학행으로 이름이 나 낙육재와 상덕사 문우관의 장을 지낸 적이 있었는데, 재직 당시 그 문풍이 대단했다고 한다. 대구판관 서유교가 지은 묘지명에 당시 그의 위상을 가늠해볼 수 있는 내용이 있다.
…달성은 나의 고향이다. 이 고을로 부임하던 날에 명망과 덕이 높고 품위가 있는 분을 찾아보려했더니만 모두가 허공을 추천하였으니… (허욱의 묘지명 중에서)
4) 백록동 서원이 아닌 백록동 서당
허욱은 만년에 지금의 가창면 우록리에 백록동 서당을 건립했다. 당시 백록동 서당의 규모는 정말 대단했다고 한다. 웬만한 서원보다 규모가 더 컸기 때문이다. 서당 내 건물구성을 보면 주 건물인 강당 외에도 파릉정사·경회당·문회당·수기당 같은 부속건물들이 있었고, 서벽헌·절서(許慥) 같은 초당도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섬학고’라는 장학기금을 설치해 서당의 모든 학생들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서당으로서는 규모가 너무 컸던 탓일까? 서원철폐령 때 그만 훼철되고 말았다. 서원도 아니고 사우도 아닌 오직 공부만을 위한 서당이었다는데. 문중자료에 의하면 서원철폐령 때 서당으로서 철폐된 곳은 전국에서 이곳 백록동 서당이 유일하다고 한다.
5) 에필로그
살펴본 것처럼 서당으로서는 유일하게 서원철폐령 때 훼철된 것으로 알려진 백록동 서당. 그렇다면 지금도 가창면 우록리에 백록동 서당이 남아 있을까? 안타깝다고 해야 될까 아니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넓디넓은 백록동 서당 터에는 과거 이곳에 서당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은행나무 고목 한그루와 다 쓰러져가는 서당 건물 한 채만이 남아 있다.[훼철 후 복원된 건물로 이 건물도 올여름을 넘기기는 힘들 것 같다] 대청 대들보 한쪽 귀퉁이에 묵서로 남아 있는 동고록(同苦錄). 아마도 여기에 이름이 올라 있는 세 분이 백록동 서당 최후의 동창생이 아니었을까? 아! 백록동 서당도 또 이렇게 사라지나보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