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이번에도 십승지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십승지(十勝地)는 천재지변·전쟁·전염병·기아와 같은 재난의 피해를 입지 않는 살기 좋은 땅을 말한다. 십승지에 대해서는 『정감록』을 비롯한 각종 비결서 등에 그 내용이 잘 나타나 있는데, 구체적인 지역에 대해서는 책마다 조금씩 다르다. 십승지와 비슷한 개념 중에 동천(洞天)이 있다. 이는 도교에서 말하는 신선들이 사는 땅으로 그 풍광이 마치 무릉도원처럼 아름다운 곳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 고장에도 십승지 혹은 동천으로 불리기에 정말 손색이 없는 곳이 있다. 바로 달성군 가창면 우록2리, 이른바 백록마을이라 불리는 동네다.
2) 단양우씨 백록동 입향조 우성범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는 지명부터가 심상찮다. ‘벗우’, ‘사슴록’, 사슴을 벗한다니 말이다. 통상 우록으로 불리는 우록1리를 지나 최정산 골짜기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우록2리가 있다. 그런데 이 마을의 이름이 더 심상찮다. 흰사슴이 노니는 마을, 백록동(白鹿洞)이다. ‘우록’이 ‘백록’이 되었으니 보통의 사슴이 신령스런 흰사슴으로 업그레이드된 셈이다. 백록동의 본래 이름은 신선이 노닐었다는 선유동(仙遊洞)이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470년 전 단양우씨 백록동 입향조 우성범(禹成范) 선생이 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으면서 선유동이 백록동이 되었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백록마을 뒷산에 세워져 있는 ‘단양우씨백록동유허비’, 백록마을회관 앞 ‘백록마을유래비’, 백록당 경내의 ‘백록동 고리의 연원비’ 등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 대강을 요약하면 이렇다.
백록동의 본래 이름은 선유동이었다. 1554년경 단양우씨 판서공 우홍명의 5세손인 우성범이 선대의 피난처인 청도 풍각의 송천을 떠나 최정산 아래 선유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가 거처를 옮기던 날 밤에 큰 눈이 내렸는데 흰사슴 한 마리가 상처를 입고 그의 집으로 들어왔다. 그는 사슴을 구해준 뒤 자신의 집 이름을 흰사슴이 찾아온 집이라는 뜻에서 백록당이라 지었다. 마을이름인 백록동, 그의 호인 백록당은 모두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
참고로 백록동에 대해 사족을 달면 백록동이라는 이름이 주자의 백록동서원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하나같이 중국 북송시대의 성리학자였던 주자[주희]를 그들의 영원한 멘토로 삼았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모든 행적을 따라했는데 그중에는 건물의 이름이나 지명을 따르는 예도 있었다. 실제 우록리 일원에는 자양·백록·한천 같은 지명이 있는데 이는 모두 주자의 강학소였던 자양서원·백록동서원·한천정사 등에 기원한 것이다. 우성범은 소요당 박하범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31세에 생원시에 합격한 유학자였다. 따라서 그 역시도 분명 주자를 흠모했을 것이다.
3) 임란의병장 송담 우배순
백록당 우성범은 슬하에 우배순·우배흠·우배화 3형제를 두었다. 이들 중 장남인 송담 우배순은 임란의병장으로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임란 당시 그는 지역의 박모, 장모, 손모 3인의 의사와 함께 100명 규모의 의병을 일으켜, 인근의 남지장사에 주둔하고 있던 사명대사의 5백여 승병과 합동작전을 펼쳐 여러 번의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최정산 팔조령 전투에서 그의 애마와 함께 전사하였으니 향년 27세였다. 그리고 그의 전사 소식을 전해들은 곽씨 부인도 같은 날 백록동 고택에서 남편을 따라 순절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유적지인 백록동 고택과 남지장사 등이 임진란 때 모두 소실된 탓에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은 전무하며, 그의 묘소조차 실전되어 제단으로 대체하고 있다.
4) 흰사슴과 신선이 노니는 백록당과 선유정
사슴이 노닐 정도라면 웬만큼 깊은 산중이 아니고서는 힘들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교통이 한없이 편리해진 지금도 백록동은 아무에게나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는 않는다. 물론 지금은 마을 구석구석까지 승용차가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백록동과 바깥세상과의 거리감은 대단히 멀다는 점이다. 특히 물리적인 거리감에 비해 심리적인 거리감은 거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최정산 첩첩 산중마을, 대구의 젖줄인 신천이 시작되는 마을, 설원에는 백록이 뛰어 놀고 계곡에는 신선이 노니는 마을이니 말이다. 백록마을의 랜드마크는 마을 초입에 있는 마을회관이다. 그런데 주변을 잘 살펴보면 진짜 랜드마크는 따로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마을회관 인근에 있는 백록당이 그것이다. 백록당은 우성범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재실이자 ‘단양우씨판서공파백록종중’의 종회당이다. 1960년대에 처음 건립되었다가 2004년에 중건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췄다. 백록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 대문에는 최정문이라 편액되어 있다. 백록당 옆에는 백록동의 옛 이름인 선유동에서 이름을 빌려온 선유정(仙遊亭)이라는 건물도 있다.
5) 에필로그
우록과 백록마을은 누가 뭐라고 해도 십승지이자 동천임에 분명하다. 그 옛날 신선, 백록, 우성범이 노닐었고, 임진왜란 때 조선에 귀화한 왜군 장수 모하당 김충선이 이곳에 터를 잡았으며, 역시 같은 시기에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도 최정산 북쪽에 대명단을 설치하고 망향의 슬픔을 달랬다. 그 후에는 은율재 이명철, 수졸재 허욱 등이 이곳에 들어와 강학하고 은거했는데 그 유적들이 모두 남아 있다. ‘아! 이 마을 어딘가에 분명 백록동천이라 새긴 바위가 있을 것인데…’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