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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69. 북쪽에는 북지장사 남쪽에는 남지장사
  • 푸른신문
  • 등록 2019-05-2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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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십승지(十勝地)’ 혹은 ‘동천(洞天)’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이상적인 복지, 즉 온갖 재난으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는 살기 좋은 땅, 풍광이 아름다운 땅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 고장에도 이에 해당하는 곳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한 곳이 달성군 가창면의 백록동이다. 이 백록동 깊은 골짜기에 천년고찰이 하나 있으니 바로 남지장사(南地藏寺)다. 

2) 북쪽에는 북지장사 남쪽에는 남지장사
‘북팔공 남비슬’, 대구의 북쪽에는 팔공산이 있고 남쪽에는 비슬산이 있다. 같은 맥락에서 ‘북지장 남지장’도 있다. 북 팔공산에 북지장사가 있고, 남 비슬산에 남지장사가 있다는 말이다. 이중 비슬산 남지장사는 다른 말로 최정산 남지장사라고도 한다. 이는 남지장사가 비슬산의 최고 북쪽 산봉우리인 최정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것에 연유한 명칭이다. 남지장사는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인 684년(신문왕 4) 양개조사라는 스님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창건 당시 남지장사는 8개의 부속 암자를 거느린 큰 사찰로 승려의 수가 무려 3,000명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신라말 고려초 어느 시기엔가 폐사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고려조에 와서 1260년(원종 1) 보각국사 일연에 의해 중창되었으며, 조선조에 와서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53년(효종 4) 인혜 스님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는데, 당시 전각의 수가 11개에 달했다고 한다. 이후 모계·지월대사 등에 의해 여러 차례 중건과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 사찰명인 남지장사는 1767년(영조 43) 모계 스님에 의한 중창 이후 개명된 것으로 팔공산의 북지장사와 서로 대칭되는 곳에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남지장사 이전의 사찰명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알려진 내용이 없다. 참고로 남지장사는 무학대사가 한때 수도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 유정의 3천 승병 및 우배순 의병부대의 훈련장으로 사용된 곳이기도 하다.


3) 최정산남지장사사문과 해탈문


2010년을 전후해 남지장사에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다. 현재 사찰 전면으로 마치 성벽처럼 높고 길게 쌓아올린 석축이 이때 조성된 것이다. 사찰 경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석축 가운데로 나 있는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돌계단을 어느 정도 오르면 눈앞에 앙증맞게 생긴 절집 문이 나타난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 절집 문이 알고 보면 보통이 넘는 절집 문이다. 일반적으로 사찰에는 3개의 문이 있는데 이 3개의 문을 모두 통과해야 불법의 세계인 법당에 이를 수 있다. 3개의 문 중 제일 먼저 만나는 문이 세속과 승속의 경계에 있는 일주문이다. 그 다음 만나는 문은 천왕문이다. 천왕문은 동·서·남·북 4방위에서 불법을 수호한다는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는 문이다. 천왕문 다음에 만나게 되는 문이 이른바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인 해탈문이다. 그런데 대체로 이 해탈문에는 좀 특별한 건축적 기교가 적용되는 예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누마루 아래를 통해 진입하는 누하진입(樓下進入) 방식이다. 사람들은 누마루 아래를 지나 급경사 돌계단을 오를 때 심리적으로 긴장을 하게 된다. 하지만 돌계단을 어느 정도 오르고 나면 서서히 눈앞에 펼쳐지는 환상적인 장면을 통해 해탈감을 느끼게 된다. 마치 영화관의 스크린을 바라보는 것처럼 밝은 빛과 함께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법당 등이 순차적으로 시야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남지장사의 높은 석축과 그 가운데에 조성된 돌계단 그리고 그 너머에 세워진 작은 절집 문.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세 요소가 서로 삼위일체를 이뤄 해탈문이라는 드라마틱한 극적효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참고로 남지장사 절집 문에는 두 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남쪽에는 ‘최정산남지장사사문(最頂山南地藏寺沙門)’, 북쪽에는 광명루라 편액이 걸려 있다. 남지장사 절집 문은 가운데 1칸만을 문으로 사용하고 좌우 각 1칸씩은 범종루와 문간채로 사용하고 있다.


4) 지장전이 없는 남지장사


남지장사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그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는다. 다름 아닌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인 명부전[지장전]이 없다. 지옥중생이 단 한 명이라도 남아있는 한 열반하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미륵불이 올 때까지 중생구제의 책임지고 있는 지장보살. 그런데 세상에는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다. 절집 이름이 남지장사임에도 이 절집에는 지장전이 없다. 주법당인 대웅전과 부속법당인 극락전도 있는데 정작 있어야 할 것 같은 지장전은 없다.[예전에는 남지장사 경내의 서편에 시왕전이 있었다고 한다.] 여하튼 지장전이 없는 지금의 남지장사는 마치 ‘앙꼬 없는 진빵’을 맛보는 것처럼 뭔가 허전함을 감출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낙담할 필요는 없다. 남지장사 대웅전 내부를 잘 살펴보면 상단에 모셔진 삼존불과는 별도로 한쪽에 봉안된 푸른색 머리의 작은 지장보살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석조지장보살좌상은 조선후기 경상도 일원에서 조각승으로 활동한 승호 스님이 1659년(효종 10)에 제작한 것인데, 2019년 1월 남지장사 석조석가여래삼존좌상과 함께 대구시유형문화재로 등록되었다. 


5) 에필로그


남지장사의 일주문이자 동시에 해탈문이라고 할 수 있는 ‘최정산남지장사사문’. 여기에서 사문(沙門)이라는 말은 불교의 출가수행자 곧 승려를 일컫는 표현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유교에서도 유학자를 일컬어 사문(斯文)이라고 한다. 단 한자는 서로 다르다. 이와 관련해 우리고장 화원읍에 있는 사문진(沙門津) 나루의 지명유래설 중에는 큰 절[사문] 인근에 있는 나루[진]에서 연유되었다는 설도 있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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