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조선시대 대구에는 5개의 사액서원이 있었다. 사액서원은 조정으로부터 서원의 현판을 하사받은 서원으로 일종의 국가공인 서원이다. 동구 연경동의 ‘연경서원’, 북구 산격동의 ‘구암서원’, 달성군 구지면의 ‘도동서원’, 하빈면의 ‘낙빈서원’, 유가읍의 ‘예연서원’이 그것이다. 이중 연경서원만이 현재 미복원 상태이고 나머지 4곳은 모두 복원이 되었다. 그런데 이중 낙빈서원(洛濱書院)은 말이 복원이지 사실은 서당 수준의 미완의 복원에 멈춰있다. 복원된 건축물이라는 것이 담장과 출입문 그리고 강당 한 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또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2) 낙빈서원의 유래
낙빈서원은 달성군 하빈면 묘골의 ‘하빈사(河濱祠)’라는 사당에서 출발한다. 하빈사의 창건유래는 마치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법할 정도로 아주 드라마틱하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내용을 요약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456년(세조 2) 단종복위 운동의 실패로 사육신 6명은 모두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박팽년 역시 아버지·형제·아들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9명의 남자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고, 여자들은 노비가 되었다. 하지만 하늘의 도움이 있은 것일까? 임신 중이었던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 성주이씨가 아들을 출산한 것이다. 아들을 낳으면 죽이라는 세조의 명이 있었지만, 그녀의 아들은 친정집 여종의 딸과 몰래 바꿔져 비밀리에 길러진다. 그가 바로 사육신 중 유일하게 혈육을 남긴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박비)이다. 선조 때에 이르러 박팽년의 현손인 박계창이 고조부인 박팽년의 기일에 꿈을 꾸었다. 꿈에서 자신의 집 사당 앞을 오가는 남루한 옷차림의 사육신 다섯 어른을 뵌 것이다. 그날부터 그는 사당에 사육신 5분의 신위를 더 설치하고 함께 제사를 모셨다. 인근 성주에 살고 있던 한강 정구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조언하기를 “사삿집 가묘에서 사육신 모두를 제향 하는 것은 예에 미안한 것입니다. 꼭 뜻이 그러하다면 가묘는 그대로 두고 별묘를 세워 사육신을 따로 제향 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이 조언에 따라 사육신을 별도로 제향하기 위해 별묘를 하나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하빈사’다.
3) 하빈사→낙빈서원→훼철→낙빈서원→육신사
빈사가 처음 창건된 것은 1675년(숙종 1)의 일이다. 이후 1691년(숙종 17)에 낙빈서원으로, 1694년(숙종 20)에 도내 사림들의 청원으로 비로소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그 뒤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낙빈서원은 훼철된다. 훼철 당시 사육신 여섯 분의 위패를 서원 뒷산에다 묻었는데, 이 매판소를 한동안 가묘(假廟)로 삼았다고 한다. 그 뒤 일제 강점기였던 1924년 현재의 위치에 낙빈서원이 다시 복원되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복원은 미완의 복원에 그쳤다. 사당과 동·서재 없이 강당 한 동만 복원되었으며, 위치도 본래의 자리에서 뒤로 조금 물려 복원했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당시 우리나라에 산재한 원사[서원과 사우]의 숫자는 대략 1,000개에 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흥선대원군은 1,000개의 원사들 중에서 달랑 47개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없애버렸다. 하지만 이때 없어진 원사들은 대원군의 실각과 동시에 다시 복원이 시작되어,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에 있다. 정확한 통계자료는 없지만 대원군에 의해 훼철된 원사 중 상당수가 이미 복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하튼 대구의 5대 사액서원 중 한 곳이자 사육신을 제향했던 낙빈서원은 이처럼 미완의 복원에 멈춰 있다. 그런데 낙빈서원이 미완의 복원에 머물고 있는 까닭은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동네에 있는 ‘육신사’ 때문이다.
육신사는 1970년대 중반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추진된 ‘충효위인유적정화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되었다. 그런데 당시 사육신 현창사업이 기존 파회마을의 낙빈서원이 아닌 묘골에다 새로운 추모시설[육신사]을 건립하는 방향으로 진행된 것이다.[묘골과 파회는 인접한 마을로 둘 다 순천박씨 집성촌이다] 이를 분기점으로 하여 파회의 하빈사와 낙빈서원이 300여 년간 이어온 사육신 제향의 역사가 묘골의 육신사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4) 파회마을 대숲에 숨은 낙빈서원
낙빈서원은 삼가헌이라는 고가로 유명한 달성군 하빈면 파회마을 뒷산 언저리에 있다. 낙빈은 기본적으로 ‘낙동강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유교라는 큰 틀에서 보면 중국의 ‘낙수’와 ‘하빈’에까지 그 맥이 닿아 있다. 삼가헌 앞을 지나 뒤편으로 1-2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대숲 속에 파묻혀 있는 낙빈서원을 만날 수 있다. 낙빈서원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 전면으로 반 칸 툇간이 있으며, 가운데 2칸은 대청, 좌우 각 1칸씩은 방이다. 낙빈서원 앞쪽으로 제법 넓은 평지가 있는데 그곳이 훼철 이전의 본래 낙빈서원이 있었던 자리다. 그리고 과거 서원철폐령 때 강당 뒤편 대숲 위쪽에다 사육신의 위패를 묻었는데 지금까지도 그대로 묻혀 있다고 한다.
5) 에필로그
하빈사가 처음 세워지고 300년 후인 1975년을 전후하여 지금의 육신사가 건립되었다. 300여 년간 사육신 여섯 어른을 제향 해왔던 하빈사와 낙빈서원.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하빈사와 낙빈서원은 이제 자신의 지위와 역할을 묘골의 육신사에 넘겨주고, 오늘도 조용히 파회의 죽림(竹林) 속에 묻혀 있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