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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60. 조선시대 대구 대표 사립대학, 이강서원
  • 푸른신문
  • 등록 2019-03-2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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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대구 유학에 있어 최고의 절정기는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중반이었다. 당시 이 최절정기의 문풍을 이끈 대표주자는 낙재 서사원과 모당 손처눌이었다. 이 둘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구 유학 2세대의 대표 주자이자 조선중후기 대구의 문풍을 이끈 대표인물이다. 이중 우리 고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 서사원이며, 그를 기리는 서원이 이강서원이다.


2) 조선시대 대구 대표 사립대학


조선시대 대구에는 약 25개 정도의 서원이 있었다.[현풍현 제외] 이중에서 요즘의 지방명문사립대학 정도의 위상을 지닌 서원을 꼽으라면 대략 3개 정도를 들 수 있다. 연경서원·이강서원·청호서원이 그것이다. 연경서원[1565년]은 대구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이다. 이에 비해 이강서원[1639년]은 서사원의 강학소인 선사재의 맥을 이은 대구 서부권 최고의 서원이며, 청호서원[1694년]은 손처눌의 강학소인 영모당의 맥을 이은 대구 동부권 최고의 서원이었다. 이처럼 조선중후기 대구 유학계는 팔공산 남쪽의 연경서원을 정점으로 하여 동부권은 수성구 황금동의 청호서원이, 서부권은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의 이강서원이 각각 그 문풍을 드날렸다고 할 수 있다.[물론 현풍현까지 포함한다면 도동서원을 비롯한 기라성 같은 서원들이 즐비하다] 오늘날 S대를 중심으로 K대·Y대 하듯이 조선시대 대구의 서원은 연경서원을 중심으로 ‘좌청호, 우이강’이 있었다.


3) 대구가 낳은 큰 선비, 낙재 서사원


서사원(徐思遠)의 자는 행보, 호는 처음에는 만오당 또는 미락재였다가 나중에 낙재로 고쳤다. 그는 본래 서흡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7세 때에 큰아버지인 서형의 양자가 되었다. 이로서 그는 대구 최대의 명문이었던 달성서씨 문중의 12대 대종손이 되었다.
그는 생전에 이황과 조식 양 선생의 문하에 출입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학문적 연원은 두 선생에게 두었으며, 한강 정구를 평생토록 스승으로 모셨다. 그는 26세[1575년]에 향시에서 장원을 했다. 37세 때는 「독서연단부」를 지어보라는 조정의 시험에 응시해 장원을 하여 당시 조정의 관리들을 감탄시켰다. 43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실질적인 대구 최초의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49세[1598년] 때에 청안현감을 끝으로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 대구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우리지역인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 금호강가의 ‘선사재’와 ‘이천정사’에서 강학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선사재는 이천리 금호강가 절경에 자리한 유서 깊은 유적이었으나 안타깝게도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본래 선사재터는 고운 최치원이 노닐던 유적으로 신라시대 때 ‘선사암’이라는 암자가 있던 터였다. 바로 이 터에 조선시대 들어와 대구 유학의 1세대로 분류되는 임하 정사철이 ‘선사서재’를 열었다. 이후 선사서재는 임진왜란으로 소실이 되었다가, 1601년(선조 34) 서사원에 의해 선사재라는 이름으로 중창, 대구를 대표하는 강학소로 유명세를 떨쳤다. 중창 당시 선사재는 강당인 완락당과 동재인 경재, 서재인 의재로 구성되었으며, 또한 건물 아래에는 최치원의 유적이었던 세연지·무릉교·난가대·연어대 등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선사재는 퇴락하고, 인근의 이강서원이 선사재의 맥을 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강서원 강당 이름이 선사재 강당 이름과 같은 ‘완락당’으로 명명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서사원은 56세[1605년] 때 선조의 명에 의해 전국에서 7인의 선비를 뽑아 천거하라는 선발에 현풍의 대암 박성과 함께 뽑힌 적이 있었다. 이후 여생을 이천리 금호강가에서 보낸 그는 1615년 향년 66세를 일기로 졸하였다. 철종 조에 이조참의에 증직이 되었고, 대구 이강서원·구암서원, 청주 구계서원에 제향 되었으며, 대구를 대표하는 인물인 ‘달성십현’에도 올랐다.


4) 미완의 복원, 이강서원


이강서원은 서사원 사후 24년 뒤인 1639년, 그의 생전 강학소였던 이천정사 터에 세워진 서원이다. 처음의 이강서원은 강당·사우·고직사 등을 모두 갖췄다. 하지만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지금은 강당인 완락당과 솟을대문인 이락루만 복원된 상태다. 복원된 완락당은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전면으로 반 칸 툇간이 있으며, 좌우 양 측면에 부섭지붕을 덧댔다. 완락당이라는 당호는 주자의 자양서원의 예를 취한 것으로 도를 즐기는 즐거움을 뜻한다. 한편 3칸 솟을대문은 가운데 한 칸만 출입문이고 좌우 2칸은 문간방이다. 그런데 이 문에 붙어 있는 편액이 좀 이상하다. 이락문이 아닌 이락루이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훼철 이전 서원의 전면에 이락루라는 누문이 있었다는 뜻인 것 같다. 또 다른 의문은 ‘이락루[二樂樓·즐거울 락]’인지 아니면 ‘이요루[二樂樓·좋아할 요]’인지 하는 의문이다. 미락재·낙재·완락당 등을 참고하면 이락루인 것 같은데, 논어에 나오는 ‘인자요수 지자요산’을 고려하면 이요루일 것 같기 때문이다.


5) 에필로그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대구를 중심으로 하는 낙동강 중류지역에는 정구와 장현광을 중심으로 하는 ‘한려학파’가 학문적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필자는 이 시기 대구유학의 흐름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드는 비유가 있다.
‘대구유학의 중시조는 한강 정구 선생이며, 한강의 학맥을 이어 대구 유학을 중흥시킨 대표적인 인물은 낙재 서사원과 모당 손처눌이다. 이들은 각각 대구 서부권(선사재)과 동부권(영모당)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요즘말로 유명 사립대학의 석좌교수라 할 수 있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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