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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59. 우리나라 하빈이씨의 성지, 원모재
  • 푸른신문
  • 등록 2019-03-1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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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대구의 뿌리 달성 꽃 피다’, 이는 달성군의 캐치프레이즈이다. 필자는 2015년 봄, 대구의 시내버스 차량 옆면에 붙어 있는 이 캐치프레이즈를 처음 보는 순간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구와 달성의 관계를 너무나도 정확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물론 옛 ‘달성’과 지금의 ‘달성군’은 그 뿌리가 분명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그 표현이 참으로 절묘하다는 점이다. 이번에는 대구의 뿌리 달성 중에서도 하빈을 자신들의 본관으로 삼는 하빈이씨 문중의 재실인 원모재(遠慕齋)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2) 하빈이씨 시조, 하빈군 이거


달성군 하빈면 무등리 낫골에 있는 원모재는 하빈이씨 문중의 재실이다. 좀 더 정확히는 하빈이씨 시조인 문정공 이거        를 추모하는 재실로, 그 인근에는 역사가 무려 800년이 넘는 이거의 묘소도 있다. 이거는 자가 거옥, 시호는 문정으로 고려 때의 인물이다. 그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하나 전한다.


1170년 정중부에 의해 무신의 난이 일어났다. 무신정권에 의해 의종은 폐위되고 명종이 왕위를 이었다. 1174년 병부상서 겸 서경유수로 있던 조위총이 난을 일으켰다. 고려 의종을 폐위한 무신정권의 수장 정중부·이의방 등의 무리를 제거하기 위한 난이었다. 당시 낭장의 신분으로 이 난에 가담한 이거는 중요한 임무를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화주성의 성문을 내부에서 열어 조위총의 군대가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조위총의 반란군은 한 때 맹위를 떨칠 수 있었다. 하지만 2년 뒤인 1176년 6월, 조위총의 반란군은 무신정권에 의해 진압된다. 세월이 흐른 뒤 이거는 조위총의 난과 관련해 왕실에 대한 충을 인정받아 예부상서에 이르고 하빈군에 봉군되었다. 이러한 내력에 연유하여 이거의 후손들은 하빈을 본관으로 삼고, 그를 하빈이씨의 시조로 삼았다.



참고로 이거의 시호는 문정(文貞)인데 이는 ‘널리 배워 이로움에 통했으며, 마음을 오로지 하여 두 임금을 섬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3) 하빈이씨 중시조, 이우당 이경


중시조는 시조 이후 가문을 크게 중흥시킨 훌륭한 선조를 말한다. 하빈이씨 종중의 14개 파에서 공히 자랑스러운 조상으로 내세우는 중시조가 있다. 바로 이우당(二憂堂) 이경(李瓊)이다. 그는 이거의 손자로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나라 안에 소문이 났다. 그의 나이 15세 때 고려 충정왕이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만나보았다. 왕은 그의 재능을 확인하고는 서책과 지필묵 등을 하사하면서 왕명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며 격려했다고 한다. 그의 나이 24세 때인 1360년(공민왕 9), 과거에서 정몽주가 장원급제를 할 때 그 역시 12위로 동방급제를 했다. 이후 화주목사 등을 역임했고, 우왕 시절에는 간신 이인임 일파에 의해 정몽주 등과 함께 유배형을 입기도 했다. 그의 호 이우당은 길재가 지어준 것인데, 나아가도 나라 걱정, 물러나도 나라 걱정을 한다는 뜻이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졌다. 그 해 10월 16일, 그는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등지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이른바 ‘두문동72현’에 든 것이다. 두문동으로 들어간 이후 그의 행적은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 심지어 선생의 몰년조차도 알 수가 없다. 


4)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


금년 2019년 삼일절은 3·1만세운동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삼일절이었다. 이에 사회 각계각층에서는 3·1만세운동의 영향을 받아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새롭게 조명하는 행사들이 많이 열렸다. 그런데 하빈이씨 인물 중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 있다. 바로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성재 이동휘이다. 그는 한성무관학교를 수료한 무관으로 평생을 교육사업과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망명지인 연해주 신한촌에서 서거한 조국독립운동의 지도자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그의 유해를 모신 묘가 없다. 1935년 서거 당시 연해주 신한촌에서 고려인장으로 장례식을 치르고, 에르바야 레츠카 공동묘지에 안장된 것까지는 확인이 되었지만, 지금껏 유해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 서울 현충원 무후순국선열제단에 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5) 먼 선조를 사모하다, 원모재


본래 원모재는 인근에 있는 하빈이씨 시조 이거의 묘소 수호재실이었다. 1941년에 낫골(겸동)의 현령공파에서 성금을 모아 고가 하나를 매입하여 이건한 것이 원모재의 출발이었다. 이후 세월이 흘러 원모재가 퇴락하자 1년여의 대대적인 증개축 공사를 거쳐 1996년 겨울, 비로소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춘 것이다. 원모재는 강당, 동·서재, 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은 높은 기단위에 정면 5칸, 측면 2.5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전면으로 반 칸 툇간을 두었다. 정면에서 마주 보았을 때 가운데 3칸은 대청, 나머지 좌우 각 1칸씩은 방이다. 한편 강당 아래는 넓은 뜰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동·서재가 놓여 있다. 각각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홑처마 건물이다. 또한 동재 앞뜰에는 하빈이씨유허비와 송덕비가 있고, 서재 남쪽에는 헌성비가 있다. 외삼문은 솟을삼문으로 이름은 비룡문이다.


6) 에필로그


살펴본 것처럼 하빈이씨는 하빈 땅의 아주 오랜 토박이다. 하빈을 자신들의 성씨 본관으로 삼은 것도 그러하고, 낫골에 있는 원모재와 800년 내력의 시조 묘소를 봐도 그렇다. 그런 만큼 이곳을 우리나라 ‘하빈이씨의 성지’라고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 외 하빈이씨 문중의 중요한 유적으로는 중시조인 이우당 이경의 재실인 대구시 북구 연경동의 ‘이우당’과 거창 가조의 ‘기동서원’, 합천 묘산의 ‘추모재’ 등을 들 수 있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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