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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고 답하다] 버큰헤이드 정신
  • 푸른신문
  • 등록 2022-07-07 14: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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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처럼 훌륭한 역사를 지닌 나라에서는 그 국민이 긍지를 가지고 지켜 내려오는 여러 가지 전통이 있다. 그 중의 하나로 영국에서는 ‘버큰헤이드 Birkenhead호’를 기억하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 항해 중에 재난을 만났을 때 그 배에 승선하고 있는 선원들이나 승객들은 서로서로 상대방의 귀에 대고 조용하고 침착한 음성으로 “버큰헤이드호를 기억하라 (Remember Birkenhead)”고 속삭인다.
해양국가인 영국의 해군에서 만들어진 이 전통 덕분에 오늘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생명이 죽음을 모면해 왔다. 일찍이 인류가 만들어온 많은 전통 가운데 이처럼 지키기 어려운 전통도 아마 다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또 이처럼 고귀한 전통도 없으리라 생각된다. 이것은 실로 인간으로서는 최대한의 자제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120여 년 전, 185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 영국 해군의 자랑으로 일컬어지고 있던 수송선 버큰헤이드 호가 병사들과 그 가족을 태우고 남아프리카를 향하여 항해하고 있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은 모두 630명으로 그 중 130명이 부녀자였다.
아프리카 남단 케이프타운으로부터 약 65키로미터 가량 떨어진 해상에서 배가 바위에 부딪쳤다. 시간은 오전 2시, 한 밤중의 일이었다. 승객들이 잠에서 깨어나면서 선실에서는 대번에 큰 소란이 일어났다. 부서진 판자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 그 사이를 벌벌 기어 갑판으로 나가려는 사람, 우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그 때 파도에 밀려 배가 디시 한 번 세게 바위에 부딪쳤다. 배는 이제 완전히 허리통이 끊겨 두 조각이 나고 말았다. 선체의 앞부분은 이내 바다 속으로 침몰되었으나 사람들은 그 사이에 가까스로 선미 쪽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이들 모두의 생명은 이제 문자 그대로 경각에 달려 있는 셈이었다. 게다가 선상의 병사들 이라고 해야 거의 모두가 신병들이었고 몇 안 되는 사관들조차 그다지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이들뿐이었다. 남아있는 구명정은 세 척 밖에 없었는데 한 척당 정원이 60명이니까 구조될 수 있는 사람은 180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더구나 그 해역은 사나운 상어가 우글거리는 곳이었다. 반 토막이 난 배는 시간이 흐를수록 물속으로 가라 앉아가도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풍랑은 더욱 더 심해만 갔다. 죽음에 직면해 있는 선객들의 절망적인 공포는 이제 극도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아래서도 선객들은 이성을 지키고 있었다.
사령관 시드니 세튼 대령은 모든 병사들에게 갑판 위에 집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수 백 명의 병사들은 사령관의 명에 따라 마치 아무런 위험이 없을 때의 훈련 시처럼 민첩하게 집합하여 열을 정돈하고 나서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동안 한 편에서는 횃불을 밝히고 부녀자들은 세 척의 구명정을 하선시켰다. 마지막 구명정이 그 배를 떠날 때까지 갑판 위의 병사들은 관병식을 하고 있는 것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구명정 위로 옮겨 타 일단 생명을 건진 부녀자들은 그 갑판위에서 의연한 모습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그 병사들을 바라보며 흐느껴 울었다.
마침내 ‘버큰헤이드호’가 파도에 휩쓸려 완전히 침몰하면서 병사들의 모습도 모두 물속으로 숨어들었다. 얼마 후 몇 사람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용케 물속에서 활대나 나무판자를 거머쥘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 날 오후 구조선이 그곳에 도착하여 살아 있는 사람들을 구출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436명의 목숨이 수장된 다음의 일이었다. 사령관 세튼 대령도 죽었다. 그는 구조선이 올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는 큼지막한 판자에 매달려 있었는데 가까이서 두 선실 보이가 죽어가고 있는 모양을 보자 판자를 그들에게 밀어주었다. 판자 하나로는 도저히 세 사람이 매달려 있을 수 없으리라 생각한 그는 두 보이 대신 자진하여 물속으로 빠져버린 것이었다. 목숨을 건진 사람 중의 하나인 91연대 소속의 존 우라이트 대위는 나중에 이 사건 현장의 목격담을 이렇게 술회하였다. “관계된 모든 사람들의 의연한 태도는 최선의 훈련에 의해서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바를 훨씬 넘는 것이었다. 누구나 명령대로 움직였고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그 명령이라는 것이 곧 죽음이라는 것임을 모두가 잘 알면서도 마치 승선 명령이나 되는 것처럼 철저하게 준수하였다. ‘버크헤이드호’의 이야기는 영국은 물론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해져 큰 충격을 주었다. ‘버큰헤이드호’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명복을 비는 기념비가 각지에 세워졌다.
그 전까지는 배가 해상에서 조난당할 경우 흔히 저마다 제 목숨부터 구하려고 소동을 벌이곤 하였다. 그러나 혼란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곤 하였다. 힘센 자들이 구명정을 먼저 타고 연약한 아녀자들이 남아 죽어야 했다.
‘여자와 어린아이가 먼저’라는 훌륭한 전통이 1852년 이 ‘버큰헤이드호’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그 후로 수많은 인명을 살려낸 것이다.

구용회 건양사이버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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