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지금의 논공읍 남리·북리·본리리는 서쪽으로 낙동강, 북쪽으로 잠룡산, 남쪽으로 쌍산, 동쪽으로 당납산을 경계로 하는 넓은 분지에 자리해 있다. 동서로 길쭉한 형태인데 서쪽 낙동강변에서부터 동쪽으로 가면서 남리, 북리, 본리리가 있다. 이중 북리와 본리리에는 과거 논공공단이라 불린 달성1차산업단지가 자리해 있고, 남리는 산업단지 배후지역으로 주로 주거지역이다. 논공읍 9개 행정리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곳과 가장 적은 곳이 이 지역에 있다. 인구 최다 지역이 북리와 남리, 최소 지역이 본리리다. 그런데 과거에는 이렇지 않았다. 본리리는 논공면소재지로 논공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과거 논공을 대표하는 큰 마을, 논공마을과 소도벌마을에 대한 이야기다.
달성1차산업단지가 자리 잡은 논공읍 본리리 평지 한 가운데 돌구산[130m]이라 불리는 잘생긴 동산이 있다. 20여 년 전만해도 이 산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논공, 남쪽에 소도벌이라 불린 자연부락이 있었다. 정확한 마을 역사는 알 수 없지만 ‘소도벌’이란 마을 이름만을 놓고 보면 마을 역사가 결코 만만치가 않다. 소도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2천 년 전인 삼한시대[마한·변한·진한시대] 때 있었던 특별(?)한 지역을 지칭하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두 마을 유래가 어느 정도 확인되는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며,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논공과 소도벌 두 마을이 합쳐져 본리동이 됐다. 대체로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시기에 ‘본리[본동]’란 이름을 얻은 마을은 당시 그 지역에서 가장 큰 마을들이었다. 1980년을 전후한 시기 본리리에 논공공단이 조성됐다. 결국 수 백 년 세월을 본리리에서 살아온 두 마을 주민은 정든 고향을 떠나, 지금의 남2리 사부동으로 집단이주를 했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자신들이 고향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을 앞산이자 뒷산이었던 돌구산 북쪽과 남쪽기슭에 각각 마을 유래를 새긴 마을유허비를 세워 망향의 아쉬움을 달랬다.
3) 논공 원도심이었던 ‘논공마을’
돌구산 북쪽 논공배수지 입구 한쪽에 ‘논공마을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1995년 조성된 것으로 비문은 달성문화원장을 지낸 고 채수목 선생이 지었다. 앞면에는 마을내력을 새겼고, 뒷면과 옆면에는 ‘옛마을사람’ 171명 명단이 새겨져 있다. 마을내력 일부만 요약정리하면 이렇다.
논공리는 고대 소도벌 지역으로 조선 초 창원황씨가 처음 터를 잡았다. 이후 충주석씨·김해김씨·연안차씨·남양제갈씨·동래정씨·영월엄씨·경주이씨·성주도씨 등이 들어와 논공마을을 형성하고 논공면소재지가 됐다. 1979년 논공공업단지 조성으로 주민은 남2리 사부동으로 이주했다.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해 대대로 살아온 정든 땅을 버리고 실향민이 된 이주민들이 옛 마을을 그리며 그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
4) 소도에서 유래된 ‘소도벌마을’
필자가 보기에 ‘소도벌(蘇塗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지명 중 하나인 것 같다. 학창시절 역사에 관심이 있었던 이들이라면 ‘소도’라는 말을 기억할 것이다. 사전에는 소도를 “삼한시대에 천신을 제사 지내던 성역. 각 고을에 있는 소도에 신단을 설치하고, 그 앞에 큰 나무를 세워 제사를 올렸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인 기원 전후 삼한시대에는 여러 읍락국가가 존재했다. 읍락국가에는 지금의 수도에 해당하는 국읍(國邑)이 있었고, 국읍에는 특별한 성격을 지닌 별읍이 있었는데 이를 소도라 했다. 소도는 전문 제사장인 천군(天君)이 관할하는 신성불가침지역으로 죄인이라 하더라도 소도로 도망 와서 숨으면 잡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소도에는 신을 섬기기 위한 신단이 있었는데, 큰 나무를 세워두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았다. 큰 나무는 천신과 인간의 소통로였고, 방울과 북은 신을 즐겁게 맞이하기 위한 제사장의 도구였다. 이러한 소도에 대한 기록은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고 중국 사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보인다.
돌구산 남쪽 기슭 근린공원 입구에 2006년 조성한 ‘소도벌마을유허비’가 있다. 유허비 좌우에는 옛 마을 주민 102명 명단과 유허비 건립 찬조자 명단을 새긴 표석이 있다. 유허비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소도벌은 삼한시대에 천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신성한 지역이었다. 우리 마을 소도벌은 여기에 유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소도벌에는 조선 초 신안주씨가 제일 먼저 터를 잡았고, 이어 영월엄씨·남양제갈씨·충주지씨 등이 들어와 소도촌이라 했다. 마을 뒤로 비슬산과 어두방산이 있고 앞으로는 낙동강이 흐르며, 마을 위에는 용태를 봄내는 400년 수령의 소도벌 당산목이 있다. 당산목은 예로부터 정월 보름 동제를 지내던 곳이었으나, 논공공단조성으로 주민이 남2리 사부동으로 이주한 뒤로는 동제가 끊어졌다. 성씨별로는 남양제갈씨·영월엄씨·김해김씨·월성이씨·진주강씨·충주석씨·밀양박씨·충주지씨가 살았다. 국가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주민들은 실향민이 되었지만 마음속 고향이요, 꿈속에서도 잊지 못할 고향이다.
5) 수령 400년 소도벌 당산 소나무
대구 보호수의 약 70%가 우리 고장에 있으며, [달성군 67.3%, 달서구 3.6%] 전체 보호수 수종은 느티나무가 대부분이다. 대구 보호수 중 소나무 보호수는 열아홉 그루인데 동구에 두 그루, 달서구에 한 그루, 나머지 열여섯 그루는 달성군에 있다. 그런데 대구 소나무 보호수 중 수령이나 수형, 인문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눈에 띄는 보호수가 바로 소도벌 절티골 당산 소나무다. 400년 전 남양제갈씨가 소도촌에 처음 터를 잡을 때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령 400년, 나무 높이 13m, 가슴높이 둘레 5.4m, 가슴높이 직경 1.7m로 보는 이는 하여금 절로 신성함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나무다. 아래쪽에 할머니 소나무 한 그루가 더 있었는데, 1958년 사라호 태풍 때 쓰러져 고사하고 현재는 할아버지 소나무 한 그루만 남아 있다. 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 달성1터널 현풍쪽 입구 약 250m 못 미처 우측으로 이 거대한 소나무가 보인다.
6) 에필로그
우연한 기회에 과거 소도벌 당산 소나무에서 행해진 동제 축문을 본적이 있다. 축문에는 신의 호칭을 ‘주산천왕신위(主山天王神位)’라 했다. 말하자면 ‘마을 주산에 서 있는 소나무 당산나무에 강림하신 천왕신’이란 뜻이다. 축문은 거북점을 쳐 좋은 날을 받아 당산목에 깃든 신에게 제사를 받듦으로써, 마을에 풍년이 들고, 가축이 번성하고, 소송과 질병이 사라지길 기원하는 내용이다. 필자가 이 글을 쓰기 위해 돌구산과 소도촌 당산나무를 찾은 날[2021. 11. 30.], 가을비가 내렸다. 당산나무 인근 높은 언덕에 올라 내려다본 소도촌은 운무에 싸여 신비로워보였고, 가을비에 젖은 소도촌 당산 소나무 껍질은 기름칠한 거북등껍질마냥 반짝였다. ‘그래, 괜히 소도촌이 아니었어’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