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지난주 예고대로 이번 주는 ‘교의’와 ‘감모여재도’에 대해 한번 알아보자. 혹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본 적 있는지? ‘시동(尸童), 시위소찬(尸位素餐), 좌여시(坐如尸)’ 아마 처음 듣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시동’은 ‘죽음 시’, ‘아이 동’ 다시 말해 죽은 이를 대신 하는 아이다. ‘시위소찬’은 시동처럼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앉아 밥만 축내는 것, ‘좌여시’는 시동처럼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을 말한다. 위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것이 ‘시동’이다. 도대체 죽은 이를 대신하는 아이란 무엇이고, 시동이 앉는 의자 교의와 사당을 그린 감모여재도는 또 무엇일까?
2) 죽은 이를 대신한 아이 시동이 앉았던 의자
지난주에 우리는 신주·위패·지방 등 여러 유형의 신위에 대해 알아보았다. 노파심에서 사족을 하나 달면 이런 신위는 유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불교에서도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다. 그런데 다소 충격적인(?) 유형의 신위도 있다. 바로 시동이다.
시동은 의역을 하면 ‘죽음(혼령)을 대신하는 아이’라는 의미다. 이는 고대 중국의 제사의식에서 유래된 말이다. 옛날에는 제사를 지낼 때 신위 자리에 의자를 놓고 그 위에 어린아이를 앉혀 제사 지내는 동안 신의 역할을 대신 하게 했다. 조금 어려운 내용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시동에 관련된 유교 경전 내용 한 두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예기』 「단궁」에서는 반우[返虞·우제]를 하고 시(尸)를 세운다고 했다. 『예기』 「증자문」에서는 “공자께서는 성인의 상에 제사지낼 때 반드시 시(尸)가 있어야 하고, 시(尸)는 반드시 손자가 한다. 손자가 어리면 사람을 시켜 안고 있게 한다.”고 했다. 또한 『예기』 「예기」에서는 “하나라의 법에서는 제사 때 시동을 세워두었지만, 은나라의 법에서는 앉게 하였다.”고 했다. 『예』 「곡례상」에서는 “군자는 손자를 안지만 아들은 안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손자는 할아버지의 시동이 될 수 있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시동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고 했다…
[『전통예학용어해설사전』, 이원균·송은석]
놀랍고 신기한 내용이다. 할아버지 제사에 같은 핏줄을 이어받은 손자를 교의에 앉혀 신위로 삼았다는 것과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가 제사에는 반드시 시동을 앉혀야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
그런데 이와는 조금 다른 설도 있긴 하다. 꼭 어린아이만 시동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설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의례』 「특생궤식례」 주에 “할아버지 제사는 손자 항렬을 사용하여, 동성의 적손에서 취한다 … 성인이든 어린아이든 묻지 않고 모두 할 수 있다”란 내용이 있고, 또 주나라 소공이 태산에서 지내는 제사에 자신이 직접 시(尸)를 자청한 예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꼭 손자 항렬에서 시동을 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정자는 “옛날 사람들이 제사에 시동을 쓰는 데는 지극히 깊은 뜻이 있다. 혼의 기운은 반드시 같은 류에 의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시동’ 제도는 한나라 때 사라졌다. 이후 시동의 역할은 소상[흙으로 빚은 상]이나 나무 등으로 만든 신위로 대체됐다가 북송 때에 와서 정이(程頤)에 의해 지금과 같은 형태의 신주로 정착하게 됐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시동이 앉았던 교의(交椅)라 불리는 의자만큼은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현재 성균관·향교·서원·사우·종가 사당 등에 모셔진 신위는 거의 예외 없이 교의에 모셔져 있다. 일반 사찰의 경우도 납골당이나 49제 등을 지낼 때 보면 망자의 위패는 교의 위에 모셔져 있다.
3) 마치 사당에서 제사 지내듯
신위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을 사당이라 한다. 사당은 사람이 거처하는 집과 규모나 모양이 비슷해 보통의 민가에는 없고, ‘큰집’ 중에서도 진짜 ‘큰집’ 정도는 돼야 사당이 있다. 사당이 없는 경우 사당을 대신하는 것이 감실(龕室)이다. 본래 감실은 신주를 넣어 두는 수납장으로 사당 안에 있다. 그런데 사당을 갖출 수 없는 집에서는 건물 벽장 등에 신주를 모시기도 했는데 이를 감실이라고도 했다.
일반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상식이 하나 있다. 사당이 있는 집은 모든 제사를 사당에서 지낼 것이라고.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향교·서원의 사당과 개인 집의 사당은 용도에 있어 조금 차이가 있다. 향교·서원은 모든 제사를 사당에서 모시지만 개인 집은 사당에서 모시기도 하고 안채나 별도 제청에서 모실 때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명절 차례나 시제(時祭)처럼 사당 안에 모셔진 모든 선조에게 동시에 예를 표할 때는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지만, 기일 제사처럼 특정 신위만을 대상으로 할 때는 해당 신주를 안채나 제청으로 모셔와 따로 제사를 지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당이 없음에도 마치 사당이 있는 것처럼 하고 제사를 지내는 방법이 있다. 바로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라는 사당 그림을 병풍처럼 떡하니 붙여두고 제사를 지내는 방법이다.
사당이 있더라도 특별한 사정이 있거나, 사당이 따로 없는 서민도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 지방을 붙일 수 있도록 제작된 그림. 주로 조선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사당도·영위도라고도 불렸다. 감모여재란 조상을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해서 그 분들이 마치 살아계시는 듯이 느껴진다는 뜻이다. 이 그림은 휴대가 간편하였고, 어떤 그림에는 약간의 제수가 그려져 있기도 하다.
[『전통예학용어해설사전, 이원균·송은석』]
감모여재도에서 핵심 키워드는 ‘여재’다. 『논어』 「팔일」에 나오는 말로 선조 제사를 할 때 마치 선조가 앞에 계신 것처럼 정성을 다하고, 신을 제사할 때는 마치 신이 앞에 계신 것처럼 공경을 다하라는 의미다. 비슷한 말로 ‘사사여사생(事死如事生)’이란 말도 있다. 죽은 자 섬기기를 산 자 섬기듯 한다는 말이다.
4) 에필로그
현대인들이 교의와 감모여재도를 잘 모르는 것은 만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고장에는 교의와 신주·위패를 갖춘 사당이 많이 있다. 하지만 사당 내부는 잘 볼 수 없다. 사당은 기본적으로 신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개방하지 않고 제사 때만 개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답사를 하다보면 종종 사당 문이 열려 있는 행운(?)을 만날 때도 있다. 하지만 신주·위패·교의를 모르는 이에게는 사당 문이 열려 있는 행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 고장에서 교의·신주·위패를 볼 수 있는 곳은 현풍향교·도동서원·이양서원·예연서원·암곡서원·낙동서원 같은 향교·서원이나 육신사·경충재 같은 사우·재실, 또는 한훤당종택·현풍곽씨 소례종택 등이 대표적이다. 반면 우리 고장에서 ‘감모여재도’를 볼 수 있는 곳은 현재 필자가 알기로는 없다. 감모여재도는 주로 민속박물관 같은 곳에 가야 만나볼 수 있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