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예나 지금이나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는 작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도 있지만 때론 끔찍한 사랑도 있다. 지고지순한 사랑을 소재로 한 영화 중에 ‘사랑과 영혼[고스트·1990]’이란 영화가 있었다. 비명에 세상을 먼저 떠난 남친의 영혼이, 세상에 남아 있는 여친 곁을 떠나지 못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룬 러브스토리다. 이 영화가 나오고 몇 년 뒤인 1998년 4월, 안동에서 한국판 ‘사랑과 영혼’이라 불릴만한 일이 있었다. 이른바 ‘원이엄마’ 스토리다. 31세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이응태라는 인물의 묘에서 부인이 쓴 편지와 부인의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가 나왔던 것. 그것도 세상을 떠난 지 무려 400년이나 지나서. 그런데 이 비슷한 일이 우리 고장에도 있었다. 곽내용의 부인 전의이씨가 남긴 절명사와 제문이 그것이다. 원이엄마 편지의 애절함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2) 곽내용의 부인 효열부 전의이씨 ‘이신옥’
달성군 현풍읍 소례[솔례]마을 ‘현풍곽씨 12정려각’ 입구에 비석 3기가 있다.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맨 오른쪽 비. 이 비는 지금으로부터 273년 전 소례마을에서 살다가 25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한 여인이 남긴 절명사(絶命詞·목숨을 끊으며 남긴 가사) 전문을 새긴 비다.
익히 아는 것처럼 조선시대를 살다간 우리네 여인들은 이름이 잘 남아 있지 않다. 분명 살아 있을 때는 어떤 식으로든 이름이 있었을 터인데, 죽고 나면 어찌된 영문인지 다들 ‘본관+성씨’가 된다. 그럼에도 종종 세상에 이름을 남긴 여인도 있다. ‘여중군자’라 불린 『음식디미방』 저자 정부인 안동장씨 ‘장계향[1598-1680]’, 허균의 누나이자 조선중기 천재 여류시인이었던 허초희[허난설헌·1563-1589] 등이다. 그런데 이들보다 100여년 뒤, 우리 고장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남긴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이신옥[李臣玉·1723-1748]이었다.
세상에는 ‘곽내용의 부인 전의이씨’ 혹은 ‘효열부 전의이씨’로 알려진 이신옥은 달성 하목정 창건주인 낙포 이종문의 6세손이다. 그녀는 아버지 이명후와 어머니 오천[연일]정씨 사이에서 3남2녀 중 장녀로 지금의 달성군 하빈면 기곡리 터실에서 태어났다. 3세에 어머니를 잃은 그녀는 오빠 학옹鶴翁 이응신李應臣과 함께 외가인 영천 선원마을에서 자랐다. 오빠 이응신은 매산 정중기 문하에서 수학하고 소산 이광정, 후산 이종수 등과 교유하는 등 학문으로 이름이 난 인물이었다.
이신옥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천재성을 보였다. 한 번 본 것은 잊어버리지 않았고,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빠가 매산 선생 문하에서 수학할 때 오빠의 어깨너머로 글을 익혔다고 한다. 13세에 이미 사서삼경을 읽었고 시문에도 능했다. 하지만 당시 사회분위기는 여성이 학문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중도에 학업을 중단하고 『효경』과 『열녀전』 등을 읽으며 여성으로서 부덕(婦德)을 쌓는 일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24세가 되자 그녀는 동갑인 강 건너 현풍곽씨 곽내용[郭乃鎔·1723-1747]과 혼례를 올렸다. 곽내용은 현풍곽씨 소례 청백리공파 탁청헌(濯淸軒) 곽황(郭趪)의 8세 주손[胄孫·불천위 선조를 모시지 않는 집의 맏이]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혼례를 올린 지 채 6개월도 못되어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그것도 신행도 하기 전이었다. 전통혼례에서는 혼례를 올리고 신부가 바로 시댁으로 들어가지 않고 일정기간 친정집에서 생활한 뒤 시댁으로 갔다. 따라서 신행 전이란 말은 시댁이 아닌 아직 친정집에 머무르고 있을 때를 말한다.
남편 상을 치르던 그녀는 어느 날 식음을 끊고 남편 뒤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이를 눈치 챈 시아버지는 “외아들을 잃은 나로서는 이제 너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며 그녀를 위로했으며, 병중에 있던 친정아버지도 “너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다. 내 명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며 탄식했다. 그녀는 결심을 바꿨다. 우선 살아계신 부모님께 남은 효도를 다하고, 그 후에 남편 뒤를 따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그녀는 초상 때 입었던 여름옷을 입고 겨울을 났으며, 머리를 들고 사람을 대하지 않았다. 심지어 한 집에 사는 가족과 노비조차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로부터 넉 달 뒤 병중에 있던 친정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 소식을 접하자 그녀는 먼저 죽은 남편 앞으로 제문 한 편을 지어 남편 영전에 고한 뒤 곧 자결했다. 때는 1748년(영조 24) 음력 9월 26일, 그녀 나이 25세였다.
3) 현풍판 사랑과 영혼
그녀의 장례날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소례를 떠나 장지로 향하던 상여가 남편이 묻힌 묘 앞에서 멈춰서 버린 것이다. 당시 미리 잡아놓은 그녀의 장지는 지금의 달성군 구지면 오설리였고, 남편 묘는 소례와 오설리 사이 마을인 구지면 징리였다. 소례를 떠나 징리를 거쳐 오설리로 가는 도중 징리에서 상여가 멈춰 선 것이었다. 멈춰 선 상여도 상여지만 더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남편 묘 봉분이 갈라졌던 것. 이 모습을 지켜 본 이들은 장사계획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이적이 두 혼령의 뜻이라 생각해 남편 묘에 그녀를 합장하기로 한 것이다. 뒤에 자세히 소개하겠지만, 그녀가 자결하기 직전 죽은 남편에게 올린 제문 말미에 이런 문장이 있다. “한 날 한 시에 같이 죽자는 맹서는 못 지켰지만 한 자리에 같이 묻히기를 원할 뿐입니다” 말이 정말 씨가 된 것일까? 한 날 한 시에 같이 죽자는 맹서는 못 지켰지만 한 자리에 같이 묻히고자 했던 소원은 이뤄졌던 것이다.
4) 효열부 정려
25세 꽃다운 나이로 남편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난 전의이씨 이신옥. 염습을 하기 위해 그녀가 누웠던 자리를 들추니 자리 밑에서 가사 한 폭이 나왔다. 그녀가 자결하기 전에 미리 써두었던 절명사絶命詞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녀는 자결 직전 이 글 외에 또 다른 글을 하나 더 남겼다. 남편 앞으로 쓴 제문이었다. 그녀가 쓴 제문과 절명사는 현재까지 그 내용이 그대로 전하고 있다. 학계에서는 제문은 제문대로 절명사는 절명사대로 명문 중에 명문이라 평가하고 있다. 특히 절명사는 조선시대 여성의 작품으로는 국내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곽내용과 이신옥의 애절한 러브스토리를 담은 절명사와 제문은 이후 사람들의 입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결국 경상좌우도 유림 4백여 명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는 지역 유림이 나서 경상좌우도 전체 유림에 통문을 돌리고 회합을 개최한 결과였다. 그리고 경상좌우도 유림의 노력으로 전의이씨 이신옥의 효열부 행적이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결국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 후인 1773년(영조 48) 그녀에게 효열부 정려가 내려졌다.
[다음에 계속]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