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81. 현풍 사직단 → 일제 신사 → 달성 충혼탑
  • 푸른신문
  • 등록 2021-08-26 14:40:28
기사수정

1) 프롤로그
지금의 달성군 현풍읍 부리(釜里)와 상리(上里) 일원은 조선시대 현풍현의 중심이었다. 현풍현 읍치였던 만큼 조선시대에는 이 지역에 현풍현 주요건물들이 밀집해 있었다. 지금의 현풍읍 행정복지센터와 현풍초등학교 일대였다. 이 지역 북쪽은 비슬산 서쪽 자락이, 동쪽과 서쪽은 두 개의 작은 동산이, 남쪽은 현풍천이 동에서 서로 흐르고 있다. 달성문화원과 현풍사직단이 자리한 동산은 읍치의 동쪽에 있어 ‘(읍)동산’, 충혼탑이 자리한 동산은 읍치의 서쪽에 있어 ‘(읍)서산’이라 할 수 있다. 이번에는 달성 충혼탑이 서 있는 현풍읍 읍서산[예전에는 사직산이라 칭했다] 속칭 ‘충혼탑 산’에 대한 이야기다.

2) 조선시대 현풍현 사직단
1786년 발간된 『현풍현읍지』와 1899년 발간된 『현풍군읍지』 「궁실조」에는 현풍현 관아 건물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객사 건물로 현도관·조양각·응향각이 있고, 관아 건물로는 태고헌·근민당·몽서각·향사당·현사훈련당·관덕당·안목당·상정청·호적고·사창·외창·진휼청·대동고 등이 있다. 그 외 조선말 현풍군수 홍필주가 건립한 관아부속 누정인 영호루와 현풍향교 등도 이곳에 있다. 상리는 읍치 위쪽에 있어 상리란 이름을 얻었다. 부리는 우리나라 자연부락명으로 많이 사용되는 가마실·가무실·가말 등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부리는 지형이 그릇을 굽는 가마굴처럼 생겼다거나 주변에 그릇 굽는 가마가 있어 붙은 이름이다. 그런데 현풍 부리는 이와는 좀 다른 지명유래가 전한다. 이 일대에 있는 상리 동산, 성하리 동산, 사직 동산, 세 동산이 마치 가마솥 삼발이처럼 생긴 것에서 유래됐다는 설과 성하리 근처에 마치 가마에 바람을 불어넣은 풀무[풍구]처럼 생긴 산이 있는 것에서 유래됐다는 설이다.
현재 달성 충혼탑이 서 있는 읍서산 정상에는 본래 지금으로부터 552년 전인 1469년(예종 1), 당시 현풍현감 채석견이 쌓은 현풍현 사직단이 있었다. 조선시대 사직단은 서울 도성은 물론 전국 모든 고을에 한 곳씩 있었다. 사직단은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시고 지역의 평화와 풍년을 기원하는 사직제를 지내는 제단으로 제사는 고을수령이 주관했다. 하지만 현풍사직단은 조성 439년이 지난 1908년(순종 2),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대신 그 자리에 일제 신사가 세워졌다.

3) 일제강점기 신사
일제강점기 일제는 우리나라 곳곳에 일왕과 일왕가의 시조신을 모신 신사(神社)를 세웠다. 신사를 세운 목적은 분명했다. 황국신민화, 이른바 조선인을 일본의 신하 나라 백성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아무 곳에나 신사를 세우지 않았다. 반드시 그 지역의 역사적·정신적 배경이 되는 곳을 선택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신 또는 그 지역을 대표하는 신을 모시는 공간에다 자신들의 신을 모시는 신사를 세운 것.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등을 모시는 서울 남산 국사당을 허문 자리에 남산 신사를 세우고, 달구벌 대구의 출발점이자 상징적 공간인 지금의 달성공원에 대구 신사를 세우는 식이었다.
이 점에서는 현풍 신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439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현풍현 사직단을 허물고 그 자리에 현풍 신사를 세운 것이다. 440년 가까이 현풍 고을의 평화와 풍년을 기원하던 신성한 공간이 하루아침에 일왕과 그 시조신에 대한 참배공간으로 바뀐 것이다. 당시 일제는 우리나라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나이 어린 초등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본 지면에서 소개한 적이 있는 현풍초등학교 ‘황국신민서사비’도 같은 맥락이다.[2020.2.20. ‘현풍초등 황국신민서사비’를 아시나요?]

황국신민서사비
1. 우리는 대일본 제국의 신민입니다.
2.우리는 마을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하겠습니다.
3. 우리들은 괴로움을 참고 단련해서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충혼탑 왼쪽에 무공보국수훈자공적비가 보인다.
가운데 보이는 작은 산이 현 사직단이 있는 읍동산. 충혼탑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4) 근대기 달성 충혼탑
사직산 정상의 현풍 사직단을 허물고 그 자리에 들어선 일제 신사는 1945년 1월, 우리 애국지사에 의해 사라졌다. 그가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전하는 바로는 한 애국지사가 됫병에 담긴 석유로 신사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향토사학자이자 현직 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재직 중인 이모 박사는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 ‘비슬산하 낙동강안’에서 ‘현풍 사직단에 세워진 달성군 충혼탑’이란 제목의 글을 통해 흥미로운 사실을 밝히고 있다.

… 애국지사 곽종해(郭鍾海·1891-1946)의 공훈록이 눈에 들어온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에 의하면 1945년 봄에는 달성군 현풍면의 신사방화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으로부터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다고 한다. 그는 1920년 현풍청년회 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23년 워싱턴 회의에 즈음하여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자유’ 지를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 (중략) … 곽종해의 집이 (충혼탑 아래에) 지금도 남아 있고, 묘소는 충혼탑 밑에 있다가 대전 현충원으로 옮겼다.

한편 국내에 산재한 충혼탑 자료를 검색하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일제가 우리의 역사와 정신이 깃든 신성한 공간에 자신들의 신사를 세웠던 것처럼, 충혼탑 역시 일제신사 혹은 그 비슷한 성격의 공간에다 세운 것이 여럿 있다는 점이다. 이중에는 달성 충혼탑과 비슷한 내력을 지닌 충혼탑이 있었다. 충북 청주시 서원구 사직동에 있는 충혼탑이다. 본래 이곳에는 현풍 사직단처럼 조선시대 사직단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죽은 일본군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바꿨다가, 1955년에 6·25 한국전쟁 전몰장병을 기리는 지금의 충혼탑이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현풍사직단 → 일제신사→ 달성충혼탑으로 이어지는 현풍읍 읍서산의 역사와 거의 같다.

5) 에필로그
대구에는 충혼탑이 두 곳에 있다. 대구 앞산 충혼탑과 현풍에 있는 달성 충혼탑이다. 충혼탑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을 모시고 추모하는 공간으로 주로 6·25한국 전쟁 때 산화한 군경이 대상이다. 대부분 충혼탑은 충혼탑 뒤편에 호국영령의 위패를 모신 별도의 참배공간이 있는데 달성 충혼탑도 마찬가지다. 지난 2020년 9월 이곳에 충혼탑 외에 새로운 비가 하나 더 세워졌다. ‘무공보국수훈자공적비’로 공적비 뒤쪽에 무공훈장[297명]과 보국훈장[69명] 수훈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현재 달성군에서는 2022년 현충일 이전 완공을 목표로 달성군 충혼탑 재정비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0
푸른방송_사이드배너
영남연합포커스_사이드배너
구병원
W병원
인기글더보기
최신글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
-
하루 동안 이 창을 다시 열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