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지금으로부터 565년 전인 1456년(세조 2) 음력 6월. 조선 조정에 피바람이 불었다. ‘사육신사건’이 일어났던 것. 사건 발생 5일 만에 무려 120여 명이 처형당했다. 그 중 사육신을 포함한 주동자들은 정말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거열형으로 육체는 갈가리 찢겨졌고, 머리는 장대에 꽂혀 거리에 내걸렸다. 남자는 3대가 죽임을 당했고, 여자는 부인을 비롯한 딸·며느리 등이 공신 또는 관청의 노비로 보내졌다. 사육신과 관련해 한 때 사칠신(死七臣)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기존 사육신 6인에다 ‘백촌 김문기’라는 1인을 더한 표현이다. 하지만 사칠신이란 표현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이번에는 우리 고장 달서구 성서에 정착한 백촌 선생 후손 재실에 대한 이야기다.
2) 김녕김씨 신당 입향조, 신당 김영호
김녕김씨 시조는 김알지, 중시조는 신라 경순왕이다. 김녕이라는 본관을 얻는 득관조는 김알지의 37세손으로 고려시대 때 김녕군[金寧郡·김해]에 봉군 된 김시흥이다. 백촌 김문기는 김시흥의 8세손. 사육신 사건 이후 김문기 일족은 전국으로 흩어졌다. 손자 김충립과 증손자 김충지는 상주, 현손자[5세손]인 김영시는 문중 선영이 있는 영동에서 살았다. 이후 김영시의 아들 중 3남 김제학은 경주, 6남 김범과 7남 김연학은 울산 반구에 터를 잡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울산에 터를 잡은 김범과 김연학 그리고 김연학의 아들 김영호는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김범과 김연학은 서생포 전투에서 애틋한 형제애를 보이며 순절했다. 이들 형제의 시신은 김영호가 수습해 고향 영동 천마령에 안장했다.[이후 천마령 묘는 실전되고 현재는 연고지에 각각 가묘를 조성했다] 이때의 공로로 이들 3인은 모두 임란공신에 올랐다. 무과 출신인 김범은 선무원종1등공신으로 울산 충의사, 김연학은 사후 훈련원정에 추증되고 울산 충의사 및 대구시 동구 망우공원 내 ‘임란호국영남충의단’에 제향됐다.
임란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때였다. 김영호는 아들 김응수·김응봉 등 가족과 식솔을 데리고 울산을 떠나 대구 성당동을 거쳐 지금의 성서 신당동에 터를 잡았다. 이로써 김영호는 김녕김씨 신당문중을 연 김녕김씨 신당문중 입향조가 된 것이다. 김영호의 아들 김응수(金應守)는 호가 개암(開巖), 자는 광극, 백촌 선생의 7세손이다.
3) 신당 김영호, 개암 김응수 부자를 추모하는 재실, 모암재
모암재(慕巖齋)는 김령김씨 개암공파 문중 재실이다. 성서 주산 와룡산 남쪽, 대구외국어고등학교 동편 담장과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모암재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울산 반구를 떠나 이곳 성서 신당동에 터를 잡은 김령김씨 신당 입향조 신당(新堂) 김영호와 그의 아들 개암 김응수를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세운 재실이다. 모암재라는 이름은 ‘개암공을 추모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본래 모암재는 1949년 개골산 자락 김녕김씨 선영 아래 건립한 4칸 규모 재실이었다. 당시 재실은 개암 선생 10세손 화촌 김형진이 자비를 들여 건립한 것이었다. 1990년 도시개발 때까지도 보전되었다가 1998년 2월 다시 중건한 것이 지금의 모암재다.
모암재는 규모나 건축양식으로 보면 재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서원에 더 가깝다. 외삼문·동재·서재·강당·내삼문·사당·동소문·서소문·지하주차장 등 서원건축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강당은 정면 5칸·측면 3칸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전면으로 1칸 툇간을 두고 있다. 동·서재는 정면 3칸·측면 2칸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3칸 모두 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면으로 1칸 툇간을 두고 있다. 강당 뒤편에는 별도로 조성된 담장 안에 단청을 입힌 사당이 있다. 내삼문은 솟을삼문 형식을 취했으며, 사당은 정면 3칸·측면 2칸 겹처마 맞배지붕에 풍판을 달고, 전면으로 1칸 툇간을 두었다. 현재 모암재는 향사 및 문중 종회당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각 건물에 당호(堂號)나 재호(齋號)는 아직 걸려 있지 않다.
4) 신당(新塘)과 오정동(五亭)
신당동이 있기 전 이 지역에는 ‘오정五亭’이라 불리는 자연부락이 있었다. 오정은 다섯 그루 정자나무가 있는 동네란 뜻. 오정은 임란 때 이곳에 터를 잡은 김녕김씨에 의해 처음 마을이 개척되었다고 한다. 이후 경주이씨·수성나씨·군위방씨 등이 터를 잡았다. 이들이 마을 입구나 마을 쉼터가 됨직한 동·서·남·북·중앙 다섯 방위에 정자나무 다섯 그루를 심은 것이 오정동의 유래가 됐다.
오정은 와룡산 산줄기가 동·서에서 마을을 감싸주고, 앞으로는 너른 들과 낙동강이 있어 살기 좋은 땅이었다. 하지만 큰 강인 낙동강을 끼고 있다 보니 여름철 큰물이 들면 물에 잠기는 폐해가 있었다. 이 폐해를 막기 위해 지금으로부터 약 260년 전인 1760년(영조 36), 이 마을 출신 김악소(金岳素)라는 인물이 나섰다.[신당 마을지인 『신당의 멋과 향』(2016)에는 김악소가 김영호의 현손으로 소개되어 있다] 보리 석 섬, 벼 석 섬, 목화 25근을 기금으로 출연해, 마을 앞으로 약 5백 미터에 이르는 보(堡)를 쌓았던 것이다. 이 보로 인해 오정은 고질적인 수해를 피할 수 있었고, 이때부터 ‘새로 쌓은 둑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로 신당(新塘)이라 불리게 됐다.
오정의 유래가 된 다섯 나무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하나 둘 사라졌다. 이중 한 그루가 1975년 봄까지 노쇠한 상태로 살아 있었는데, 그 해 여름 불어 닥친 풍우에 고사하고 말았다. 이에 당시 몇 몇 주민들이 나서 그 자리에 플라타너스 나무를 대신 심었는데, 현재 성서 주공2단지 어린이 놀이터에 서 있는 나무다. 한편 와룡공원 내에 있는 팽나무 보호수는 1994년 택지조성 때 인근에 있던 나무를 지금 자리로 옮겨온 것으로 옛 오정자 나무 2세목으로 알려져 있다.
5) 에필로그
성서 신당 마을지인 『신당의 멋과 향』(2016)에는 오정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역사적인 사실도 있고 지역에서 구전되는 전설도 있다. 전설 중에는 모암재 뒷산인 개골산[계골산]에 얽힌 것도 있다. 임란 때 김응수의 부인 동래정씨가 개골산 숲에 피신해 있다가 왜적의 칼을 맞고 오정동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내용이다. 또 오정나무 뿌리 싸움 전설도 있다. 본래 오정나무는 모두 회화나무였는데 한 나무가 다른 나무와의 뿌리싸움에서 져 죽고 말았다. 그 자리에 회화나무 대신 팽나무를 다시 심었는데 지금 와룡공원으로 옮겨진 나무가 그것이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