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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77. 친정 곳에 묻힌 ‘미성부’ 박씨 자매
  • 푸른신문
  • 등록 2021-07-22 14: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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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이번에는 미리 예고한 것처럼 혼례를 치룬 ‘유부녀’임에도 시댁이 아닌 친정 곳에 묻힌 박씨 자매 묘소에 대한 이야기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서는 혼례를 치룬 여인은 시댁 쪽에서 장례와 제사를 지낸다. ‘시집간 여자는 죽어서도 시댁귀신이 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세상이 바꿨다 하지만 이 문화는 아직까지 유효하다. 그런데 달성군 하빈면 묘골에는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 우리 고장에서 살다간 한 자매의 이상한(?) 묘가 있다. 동생은 미혼이었지만 언니는 분명 혼례를 치렀음에도 시댁이 아닌 친정 선영에 동생과 함께 나란히 묻혀 있다. 왜일까?

2) 출가외인 出嫁外人
출가외인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시집간 딸은 친정과는 남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라고 되어 있다. 평소 별 생각 없이 써온 말인데 사전 설명을 보니 참 매정하고 정 안가는 말이다. 출가외인이라는 말은 생각과는 달리 그렇게 오래전에 만들어진 말은 아닌 것 같다. 옛 혼례문화를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초·중기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혼례문화는 남자가 여자 집에 들어가 사는 ‘장가를 가는’ 문화였다. 이를 어려운 말로 ‘서류부가혼·남귀여가혼·솔서혼’이라 한다. 그런데 조선 후기부터 반대가 됐다. 여자가 남자 집으로 들어가 살았다. ‘시집을 간 것’이다. 이러한 혼례문화는 사회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처가살이가 시댁살이로, 각성마을이 동성마을로, 윤회봉사[자식들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심]가 종자봉사[맏이가 제사를 모심]로, 남녀균분상속제[아들·딸 구분 없는 동등한 상속제도]가 종자중심상속제[맏이 중심 상속제도]로 바꿨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는 이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모든 변화의 근본원인은 『주자가례』에서 주장하는 ‘종자종법’ 때문이었다. 집안의 모든 일은 종손·주손·장손 등 맏아들이 주관한다는 것이 종자종법이다.

3) 아직 며느리가 아니다, 미성부
‘아닐 미, 이룰 성, 며느리 부’, 미성부(未成婦). 혼례는 치렀지만 며느리로서 치러야할 나머지 절차를 다 마치지 않았기에 아직은 며느리가 아니란 뜻이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매우 이상하다. 혼례를 올렸으면 이미 부부가 됐고, 사위·며느리가 된 것이지 무슨 절차가 더 있단 말인가?
근대기 우리나라 혼례문화는 신부 집에서 혼례를 올리고, 3일 후에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3일 신행’을 행했다. 하지만 전통혼례에서는 혼례를 치루고 신부가 바로 시댁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신부는 한 동안 자신의 집에서 생활하다 시댁으로 들어갔는데 이를 신행·우귀·우례라 한다. 이 때 자신의 집에서 보내는 기간은 달을 넘기는 경우[달묵이]도 있고 해를 넘기는 경우[해묵이]도 있었다. 그럼 신행을 하면 진짜(?) 며느리가 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었다. 신행을 하고 시댁 어른과 조상신에게까지 인사를 다 마쳐야 비로소 며느리가 될 수 있었다. 이때 시부모에 대한 인사는 신행 직후 바로 행하지만, 조상신에 대한 인사는 또 석 달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일부는 석 달이란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시부모에게 인사하고, 하루, 이틀 내에 사당에 인사를 행했다. 그들은 혼례 이후 친영까지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고, 또 이 기간에 출산까지 하는 예도 있는 만큼 석 달은 너무 길다고 본 것이다.
이렇듯 전통예법에 따르면 신부는 혼례·신행을 해도, 시댁 사당에 인사를 하지 못했다면 아직 며느리로서의 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봤다. 그래서 그 전에 신부가 죽으면 참 난감했다. 예서에는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며느리가 시댁 사당에 인사를 올리기 전에 죽으면, 시댁이 아닌 친정집에서 장사를 지내는데 이는 성부(成婦)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인순천박씨묘 뒤로 묘골박씨 선영 축대가 보인다.
우측이 언니 박씨부인, 좌측이 동생 묘다.


4) 천 길 낭떠러지로 몸을 던진 박씨 자매
어려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다시 박씨 자매 이야기로 넘어가자. 달성군 하빈면 묘골 마을은 사육신 박팽년 선생 후손들의 560년 세거지다. 이 마을 입구에 사육신기념관이 있고 기념관 뒤편에 이곳 묘골박씨[순천박씨 충정공파] 문중 선영이 있다. 선영 축대 바로 아래에 작은 묘 2기가 나란히 있다. 마주 보았을 때 좌측 묘 앞에는 ‘의인순천박씨지묘’라 새긴 묘비가 있고, 우측은 없다. 이곳이 바로 박씨 부인 순절묘로 알려진 묘소인데 좌측이 언니요, 우측이 동생 묘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5월 18일. 왜적이 묘골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때 박팽년 선생의 5대손인 총관공 박충후의 두 딸이 왜적을 피해 낙동강가 높은 바위벼랑인 탁대에서 강으로 몸을 던져 순절했다. 당시 언니는 인근 하산마을 전의이씨 이종택과 혼례를 올린 후 신행을 앞두고 친정에 머물던 중 변을 당했고, 동생은 아직 처녀의 몸이었다. 나중에 이 일이 세상에 알려져 언니인 박씨 부인에게는 조정으로부터 열부정려가 내려졌다.

‘의인순천박씨지묘(宜人順天朴氏之墓)’에서 의인이란 표현은 조선시대 6품 문무관의 처에게 내린 작호로 박씨 부인의 남편 이종택은 종6품 선무랑이었다. 이종택은 임진란 때 곽재우 장군 진영에서 의병활동을 한 인물로, 당시 하빈지역 의병대장이자 달성 하목정을 창건한 낙포 이종문의 동생이기도 하다.
대구지역 옛 선비들의 문집에는 임진란 때 묘골이 왜적에 의해 초토화됐다는 기록이 있다. 임란 직후 오음 윤두수가 묘골을 방문하고 남긴 시에도 “난 후 인가가 백에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처참했던 묘골의 모습을 가늠할 수 있다. 박씨 자매가 몸을 던진 구봉산 탁대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지역에서는 탁대를 다른 말로 ‘자매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두 조각 난 형상의 탁대에는 박씨 자매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자매가 투신하는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바위가 두 조각났다는 전설이다.

5) 에필로그
전의이씨 족보에는 의인박씨 부인에게 열부 정려가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현재 박씨 부인 정려(각)은 남아 있지 않다. 전의이씨 문중을 통해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박씨 부인의 정려각은 하빈이 아닌 낙동강 건너 고령 다산 상곡에 있었다고 한다. 이 정려각은 1900년대 초까지도 존재했으나 어느 때인가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시댁이 아닌 친정 곳에 묻힌 박씨 부인 묘사는 누가 모시고 있을까? 답은 친정이 아닌 시댁 전의이씨 문중에서 모시고 있다. ‘미성부 박씨 부인’도 체백은 비록 친정 땅에 묻혔으나 혼은 어쩔 수 없이 시댁 귀신이 되었나보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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