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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고 답하다] 새삼 ‘국가’를 생각 한다
  • 푸른신문
  • 등록 2021-07-08 15:2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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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으로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을 때 우리 국군이 반격의 전기를 마련한 것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였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우리 국군 장병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여기에서 우리가 무너지면 우리나라는 끝장이다.”라는 비장한 각오로 최후의 한 사람까지 그곳에서 죽기를 결심했다. 국군 제1사단이 담당했던 다부동지역 전투는 그런 전투 중의 하나였다. 이때 국군 제1사단에서는 매일 평균 6∼700명의 인원 손실이 발생했고, 줄어든 병력은 신병과 학도병으로 보충했다. 그렇기 때문에 중대장이나 소대장이 부하들의 이름은 물론 얼굴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니 치열했던 당시의 상황이 짐작이 간다.
북한군의 8월 공세기간 중 국군과 유엔군은 1만여 명, 북한군은 3만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다부동 일대에서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해 코를 잡지 않고는 다닐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북한군이 물러나고 전장이 안정되어 미 제1기병사단이 진지를 인수하게 되었을 때, “시체를 치워주지 않으면 진지를 인수하지 않겠다”고 버티었다고 한다. 나라와 운명을 함께하기로 결심했던 선열들이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지켜낸 낙동강 방어선에서 우리나라의 운명은 다시금 소생을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해 살아 온 한 할머니의 이야기가 있다. 그녀는 6·25전쟁에 간호장교로 참전했다가 허리에 수류탄 파편을 맞고 예비역 소령으로 예편했다. 마흔의 나이에 휠체어를 타야하는 불구자가 됐지만 그녀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재활 용사촌의 양말공장 직원으로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갔다. 그녀는 30여년 동안 단 하루도 결근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고, 먹는 것 입는 것을 아껴가면서 푼푼이 돈을 모았다. 그리고 2000년 9월에 어렵게 모은 2억 원을 불우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재단 설립을 위해 기증했다. 언젠가 값진 일을 위해 쓰겠노라고 돈을 모았는데, 그 돈을 꼭 써야 할 곳에 쓰게 되어 기쁘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애국하는 길은 전선에만 있는 게 아니죠. 내가 재활을 시작한 까닭이 거기 있어요.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믿었어요. 그게 내 삶의 희망이었죠. 이제 그 일을 끝냈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혼자만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가족, 학교, 직장, 지역사회, 국가와 같은 다양한 조직에 속하여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간다. 많은 사회 집단이나 조직 중에서도 국가는 개인의 욕구와 목표를 충족시키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강력한 조직체다.
국가와 개인은 호혜적이며 쌍방적인 관계다. 국민은 국가의 보호아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면서, 개인의 안전을 도모하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가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국민 각 개인은 국민으로서 해야 할 역할과 의무가 있다. 국가는 국민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국민들은 국가의 발전과 번영에 이바지해야 하는 것이다.

구용회 건양사이버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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