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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문화유적 탐방] 172. 제갈남학 효자비각과 응암리
  • 푸른신문
  • 등록 2021-06-17 15: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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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달성군 구지면 대니산 남쪽 지역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천지개벽, 상전벽해가 일어난 곳이다. 화산리·창리·응암리·내리가 대표적이다. 넓은 들판 사이로 올망졸망 작은 동산들이 있었고, 그 동산 기슭에 많은 자연부락이 있었다. 하지만 구지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동산은 물론, 자연부락 대부분이 사라졌다. 화산·창동·방앗실·뒷터·새터·매방·이재민촌·대포동·성담·외동·안모지·갈매실·장동 등등.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이번에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살아남은 응암리 덕동[덕골]과 제갈남학 효자비각에 대한 이야기다.

응암리 입구 도로변 제갈남학 효자비각
제갈남학 효자비각 인근까지 아파트가 들어섰다

2) 제갈남학 효자비각
구지면 응암리는 구지국가산업단지조성으로 여러 자연부락이 통째로 사라진 대표 지역이다. 그 중 한 자연부락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바로 응암1리 덕곡[德谷]이다. 현풍·구지 주산인 대니산 남쪽에 일명 고랑산이라 불리는 산이 있다. 이 고랑산 남쪽 기슭에 골짜기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마을이 덕동이다. 평택임씨가 처음 터를 잡은 것으로 알려진 덕동의 본래 이름은 선곡(善谷)이었다. 500년 전 한 스님이 이 골짜기 형국이 한자 ‘착할 선’ 자를 닮았다 해서 선곡이라 했다가, 이후 누구든 이 마을에 들어와 살면 덕을 쌓고 잘 살 수 있다 해서 덕곡이 되었다고 한다.
응암리는 이 덕곡만 빼고 모든 지역이 국가산단에 들어갔다. 덕곡마을 입구까지 고층아파트가 들어섰다. 지금 덕곡마을 앞에는 옛 왕복 2차선 도로가 그대로 남아 있다. 과거 창리에서 덕곡을 지나 고봉리까지 이어졌던 버스길이었다.[지금은 그 옆으로 국가산단대로가 조성됐다] 이 옛 길 덕곡마을 입구에 작지만 품격이 느껴지는 효자비각이 하나 있다. 십 수 년 전 필자가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만 해도 비각 앞에 버스정류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다행히 제갈남학 효자비각으로 불리는 이 비각은 무지막지한 개발의 광풍을 피했다. 제갈남학(諸葛南鶴·1847-1903) 효행에 대해서는 여러 스토리가 전한다. 비각 내부에 걸려 있는 기문과 일부 자료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제갈남학은 본관은 남양, 자는 성오, 호는 필암으로 문효공 화오(花塢) 제갈자경의 8세손이다. 그는 고을에서 ‘갈효자’로 이름이 났다. 그가 어릴 적에 아버지 제갈영이 기이한 질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했다. 그가 아버지의 변을 맛보며 질병을 살피고, 북두칠성에 기도하자 아버지 질병에 차도가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잉어를 먹고 싶어 했다. 엄동설한이었음에도 그가 물가로 나가 얼음을 깨자 잉어가 홀연히 꼬리치며 올라왔다.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께 잉어를 드리니 아버지 병이 나았다. [제갈남학 효자비각기문 중에서]
○ 일찍 아버지를 여인 제갈남학은 어려서부터 효행이 탁월했다. 조부모를 봉양할 때는 직접 음식상을 들고 들어가 조부모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무릎을 꿇고 앉아 시중을 들었다. 어머니가 병들었을 때는 한 겨울에도 얼음을 깨 잉어를 잡아 회를 장만해 드렸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묘 옆에 여막을 짓고 3년 시묘를 했다. 3년 시묘 중에 이런 일도 있었다. 하루는 밤에 호랑이가 나타나 그를 위협했다. 하지만 그가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상례에 집중하느라 호랑이를 두려워하지 않자 호랑이가 그냥 물러났다. [각종 자료에 많이 소개된 내용]

제갈남학 효자비각은 1937년에 처음 세워졌다. 제갈남학의 아들 제갈두근이 아버지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지금의 것은 1979년 새로 중수한 것이다. 기와를 얹은 방형 흙돌담에 둘러싸인 효자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겹처마 맞배지붕 양식이다. 비각 내부에 ‘효자제갈남학비’가 있고, 그 뒤 벽면에 아들 제갈두근의 원운시와 서흥인 김인식이 짓고 포산인 곽제가 쓴 효자비각기문이 걸려 있다.

3) 응암리와 국가물산업클러스터
효자비각이 있는 덕곡 뒷산은 예로부터 ‘약산골’이라고도 불렸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덕골 뒷산 약산 골짜기는 언제나 큰 바위 틈에서 맑은 물이 흘렀다. 하루는 걸식하던 나병 환자가 이 마을 김씨 집에서 아침을 얻어먹었다. 김씨는 나병 환자에게 “뒷산 골짜기 바위틈에 맑은 물이 흐르니 그 물을 먹고 몸을 씻어보시오”라고 했다. 나병 환자는 그 길로 뒷산 골짜기로 들어갔다. 3일이 지나도록 나병 환자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자 김씨가 그곳에 가보았다. 그곳에서 나병 환자를 만났는데, 놀랍게도 나병이 씻은 듯 나아있었다.

현재 응암리에는 낙동강물환경연구소와 국가물산업클러스터가 있다. 낙동강물환경연구소 자리는 과거 응암리 새터부락, 물산업클러스터는 매방·이재민촌이 있었던 자리다. 덕골 바위틈에서 발원한 물은 새터·매방·이재민촌을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들었다. 나병을 낫게 한 약산골 약수가 흘러내리던 물길을 따라 낙동강물환경연구소와 국가물산업클러스터가 들어선 것이다. 우연은 아닌 것 같다.

4) 마을유허비만이라도 남겨두었다면…
유가·구지·현풍 지역 답사를 하다보면 늘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 특히 산업단지가 들어선 지역은 더욱 그렇다. 넓은 면적을 깎고 북돋우는 대규모 택지조성으로 옛 흔적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불과 십 수 년 전만 해도 많은 자연부락이 있었지만, 지금은 지역주민들조차 옛 고향 모습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과거 응암리에 있었던 큰마·안마·새터·아릇굼·사무실·대포 같은 자연부락과 수백 년 세월 마을 수호신 역할을 했던 성황목도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개발을 하더라도 자연부락이 있던 곳에는 마을내력을 기록한 마을유허비 하나쯤은 남겨두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70-80대 어르신들이 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옛 마을 모습과 마을이야기를 정리해둬야 할 것이다. 한 대만 더 넘어가면 후회해도 소용없다.

5) 에필로그
자료를 보니 응암리(鷹巖里)는 매방마을[매방우] 앞에 매가 와서 우는 큰 바위가 있어서, 혹은 매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생긴 지명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자연부락이나 산 이름에는 ‘매 응’ 자가 들어간 예가 많다. ‘응’ 자가 붙은 마을이나 산에는 대체로 옆으로 툭 불거져 나온 바위나 높이 솟은 바위가 있다. 매방에도 예전에는 그런 바위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필자는 응암리 매바위[응암]를 본 기억이 없다. 지금의 응암리는 예전 응암리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상전벽해, 뽕나무 밭이 변해 푸른 바다가 됐다는 게 정말 실감나는 동네다.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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