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를 진학할 당시에는 고교평준화 정책이 시행되던 때였다. 속된 말로 ‘뺑뺑이’로 불리는 것으로, 추첨으로 고등학교를 배정 받았다. 그렇지만 예외는 있었다. 바로 내가 들어간 서울의 우신고등학교와 같은 학교가 그랬다. 우신고등학교는 ‘특수목적지 고등학교’ 라는 명분으로 별도의 시험을 거쳐 학생을 선발하였다. 당시 OO재단에서 설립한 신흥 학교인데 나도 어떻게 그런 정보를 들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응시해서 합격하였다.
당시 경쟁률이 높아서 들어가기 어려운 고등학교에 합격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나도 중학교 때 공부 좀 한다고 해서 그 고등학교를 선택했고, 우쭐한 마음으로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게 그렇지 않았다. 이 학교에 온 대부분, 아니 거의 모든 친구들이 서울의 각 중학교에서 공부 꽤나 하던 친구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은 자랑거리이기도 하였지만 그만큼 스트레스도 적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고등학교 시절 내내 우수한 친구들에게 포위(?)되어 한 시도 편하게 공부한 날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용광로’ 속에서 나는 단련되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다른 2명의 동창생과 함께 육군사관학교에 합격하였다. 당시 동창생 700여 명이 서울의 유수 대학을 비롯하여 소위 좋다는 대학에 대부분 합격하는 진기록을 낳기도 했다.
그 친구들이 지금 각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2년 뒤에 우리 고등학교도 ‘뺑뺑이’ 하는 학교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잘못된 사례가 아닌가 싶어 씁쓸하다. 그대로 놔두었으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걸출한 인재를 배출했겠는가. 형평성도 좋지만 인재육성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암튼, 그런 사연이 있는 고등학교에서 특히 같은 반을 했던 탁용철이라는 친구를 33년 만에 만난 것이다. 잊혀졌던 친구를 33년 만에 만나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있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나면 어색하고 생경할 것 같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마치 엊그제 만나고 또 만난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서로를 맞았다. 친구는 그런 건가 보다. 특히 오래된 묵은 된장처럼 세월이 묻어나는 친구는.
구용회 건양사이버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