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설리 상동으로 불렸던 대추정[대치정]
오설리 바깥마을 외동은 본래 대추정과 밤마 두 곳이었지만 지금은 밤마 하나만 남았다. 마을입구에서 도동서원이 있는 현풍방면으로 400m쯤 떨어진 곳에 밤마가 있고, 반대로 구지방면으로 400m쯤 떨어진 곳에 대추정이 있었다. 두 마을은 입지 조건이 좀 달랐다. 밤마는 대니산 자락인 석문산 기슭에 접해 있고, 대추정은 산 쪽이 아닌 낙동강변에 접해 있었다. 그런데 10여 년 전 ‘4대강 정비사업’이 두 마을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4대강 정비사업으로 낙동강 수위가 올라가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강변마을 대추정 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정든 고향을 뒤로 하고 인근 다른 마을로 이주하게 됐다. 최근 달성군에서 조성한 구지면 강변오토캠핑장 일대가 바로 옛 대추정 마을이 있었던 곳이다. 현재 옛 마을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오설초등학교 터만은 확인이 가능하다. 그늘 한 점 없는 강변 오토캠핑장에서 유일하게 나무그늘을 제공하고 있는 키 큰 플라타너스 나무 몇 그루. 이 나무들이 바로 옛 오설초등학교 운동장가에 심겨 있던 나무다.
대추정은 마을에 대추나무가 많아서 혹은 대추나무로 만든 대추정이란 정자가 있어서 붙은 이름으로 대치정·대정이라고도 했다. 과거에는 이곳 대추정이 오설리를 대표하는 상동이었다. 강 건너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부례를 오가던 부례[부리]나루를 비롯해, 오설초등학교·양조장·약국·이발소·국수공장·농협창고·교회·자전거수리점·주막·블록공장 등이 있었으니 오설리 최대 번화가였던 셈이다.
예로부터 구지에는 ‘1 유가·2 오리[오설]·3 모지[모정]’란 말이 있다. 유가는 찹쌀, 오리는 무, 모정은 배추가 유명했다는 뜻이다. 특히 낙동강변 모래밭에서 재배된 오리 대치정 무는 심이 없고 달고 배 맛이 나, 조선시대에는 조정 진상품이었다고 한다. 오리 무가 한창 유명세를 떨칠 때는 무 수확철이 되면 낙동강변에 진풍경이 펼쳐지곤 했다. 무를 사기위한 상인들의 트럭과 군납을 위한 군 트럭이 오리 낙동강변에 줄을 섰기 때문이다. 사실 오리 무는 조선시대보다 훨씬 이전인 신라시대 때부터 이름났던 모양이다. 오리에는 오리 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오리 무는 그 맛이 좋아 신라시대 때는 경주로 진상됐다. 한 번은 오리 무를 구하기 위해 길을 나섰던 신라 관리가 영천에서 술에 취해 달성 오리까지 갈 수 없게 됐다. 관리는 어쩔 수 없이 영천 무를 구해 경주로 가져갔다. 하지만 영천 무는 오리 무의 맛을 따라 갈 수 없었다. 결국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관리는 벌을 받고 파직됐다.
2) 외동 밤마[밧마]
밤마는 밧마로도 불린다.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동네에 밤나무가 많아 밤마로 불렸다는 설과 바깥마을을 뜻하는 ‘바깥마’가 밧마가 됐다는 설이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만해도 밤마 뒷산에는 마을 수호신을 모신 서낭당이 있었다. 소나무 숲 사이 돌담 안쪽에 기와지붕을 갖춘 작은 당집이었다. 당집 내부에는 주민들이 매년 서낭신에게 바치는 공물[옷가지]이 담긴 붉은 천과 촛대 역할을 하는 작은 그릇 등이 있었다. 당집 옆에는 골짜기까지 이어진 긴 장대가 놓여 있었다. 주민들은 이 장대 속에 이무기가 산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당집 역시 사라지고 없다. 또 밤마 뒷산 너머 도동2리 절골에는 옛날부터 이름났던 기도처 두 곳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석문산성 입구에 있는 아들바위·딸바위다. 이 두 바위는 작은 골짜기를 가로 막고 위아래로 서 있는데 크기가 각각 높이 6~7m, 너비 5~6m에 이르는 거대한 바위다. 아들을 바라면 아들바위에, 딸을 바라면 딸바위에 치성을 드렸다고 하는데, 지금도 간간히 찾는 이가 있다. 현재 밤마에는 ‘한·서·조·최·김·이·박·정·차’ 등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3) 오설리 군위방씨와 현풍곽씨
군위방씨는 고려 충렬왕 때 태사성을 지낸 방적(方迪)을 시조로 하는 성씨다. 시조 방적은 충렬왕 때 왜적 토벌로 공을 세워 군위군에 봉해진 인물이다. 오설리에 세거하는 군위방씨는 한성좌윤을 지낸 니암(尼庵) 방치원(方致遠)이란 인물을 입향조로 하고 있다. 방치원은 조선조에서 병조판서를 지낸 무기당(無欺堂) 방유녕의 증손자로 벼슬을 떠난 뒤, 경남 합천에서 잠시 살다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이곳 오설리에 터를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오리 아랫덤 석문산 자락에 대규모 군위방씨 선영이 있고, 선영 입구에 재실 영모재가 있다. 영모재는 방치원과 그의 두 아들인 사헌부 장령 송재(松齋) 방문걸, 통정대부 계헌(戒軒) 방문업 등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한 묘소 수호 재실이다. 돌담에 둘러싸인 영모재는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 양식으로 지금 건물은 1947년 건립됐다.
오설리 현풍곽씨는 속칭 솔례곽씨로 알려진 현풍곽씨 청백리공파 후손이다. 군위방씨와 비슷한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오설리에 터를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설리 큰등 현풍곽씨 선영에는 청백리공 곽안방 선생의 어머니인 수성나씨 묘를 비롯한 선조의 묘가 있다. 이 선영 아래 오리 윗덤에 재실 오산재(烏山齋)가 있다. 오산재는 청백리공의 아버지 곽득종과 어머니인 수성나씨 부인, 청백리공의 큰 아들인 곽승양 부부와 손자인 곽거 부부 등을 추모하고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세운 재실이다.
4) 오설리 안산 약수터
오설리에는 안산 약수터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가 전해온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오설마을 앞산인 안산 기슭에 물 좋은 약수터가 있었다. 물이 얼마나 좋았던지 1년 365일 약수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방부자’라 불렸던 약수터 주인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손님들로 인해 너무 힘들었다. 결국 방부자는 약수터를 없애버리기로 하고, 약수터에 살아 있는 개를 집어넣고 흙으로 덮어버렸다. 이 사실이 소문이 나자 더 이상 오설리 약수터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5) 에필로그
1994년 3월 1일, 오설리에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오설초등학교가 폐교된 것. 초등학교 개교와 폐교는 그 지역 미래를 미리 알려주는 지표라 할 수 있다. 아이들이 없어진다는 것은 그 지역을 이끌어갈 미래의 주역이 없어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 옛날 오설초등학교 학생들이 불렀던 오설초등 교가를 끝으로 이번 이야기를 마무리 한다.
1. 알차게 여무는 벼 이삭처럼 우리는 튼튼한 오설 어린이, 산에서 들에서 학교 안에서 잘 배워서 지혜로운 일꾼이 되자. 우리는 튼튼한 오설 어린이, 잘 배워 지혜로운 일꾼이 되자
2.한 댓줄에 태어난 감자 살처럼 우리는 정다운 오설 어린이, 언제나 이마 위에 빛이 어려서 우리가 가는 곳에 힘이 넘치네. 우리는 정다운 오설 어린이, 잘 배워 슬기로운 일꾼이 되자
[도움: 『달구벌 문화 그 원류를 찾아서』(차성호), 향토사학자 곽정섭(70세·오설리)]
송은석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 e-mail: 3169179@hanmail.net